「서석록」[이정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368
한자 瑞石錄[李正會]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고성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58년 - 이정회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39년 - 이정회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954년연표보기 - 「서석록」[이정회] 『심재유고』 권2에 수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19년 - 이정회 무등산 유람
배경 지역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유산기
작가 이정회

[정의]

근대 학자 이정회가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글.

[개설]

「서석록」을 지은 이정회(李正會)[1858~1939]의 자는 중현(仲賢), 호는 심재(心齋)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아버지는 이기영(李基榮),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이며,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인산(仁山) 소휘헌(蘇輝憲),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에게 수학하였으며, 나라가 기울자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였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사건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저서로 『심재유고(心齋遺稿)』 4권 1책이 1954년에 편찬되어 전한다. 「서석록」은 『심재유고』 권2에 실려 있다.

[구성]

「서석록」은 유산의 동기와 주상절리의 형상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1. 유산의 동기

이정회는 1919년 4월 8일 무등산을 유람한다. 무등산에 오르기 전 양재학을 만나 양윤숙의 집을 방문하였고, 양치록, 안낙현 등의 집에 들러 유흥을 즐겼다. 그 후 양재학과 함께 무등산으로 향하였다.

2. 주상절리의 형상

이정회무등산에 오르기 위하여 처음 들렀던 곳은 대치(大峙)였다. 대치를 넘어 무등산으로 향하는데, 길을 몰라 여러 사람에게 묻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정회의 유람은 속도가 비교적 느리다. 주상절리의 모습을 "무성한 숲이 빽빽하여 마치 큰 항구에 배를 대 놓은 것 같다"고 표현하며 분명 신의 뜻을 받았다는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규봉암, 광석대, 규봉에 이르는 여정을 거친다. 다음은 규봉암의 주상절리를 묘사한 내용이다.

[본문 번역]

암석 사이로부터 좁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가시덤불을 헤치고 덩굴을 부여 잡으며 돌고 돌아 규봉암에 이르니, 이것이 세칭 광석대이다. 넓은 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져 수백 사람은 앉을 수가 있다. 많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 빽빽하게 서 있어서 병풍 휘장을 두른 듯하였다. 이는 오석산 선계의 떠나간 신선의 경지와 멀지 아니하여 역시 지조를 지키며 은둔한 선비나 신선이 지낼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성세의 화창하고 밝은 때에 방백과 수령, 시인들이 날마다 유람하며 노래와 풍류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도리어 번화한 자리가 되었다.

[특징]

「서석록」에서 '서석'은 무등산을 이르는 별칭이다. 이정회「서석록」에서 무등산 유람 후의 소회를 "평생의 숙원이었던 서석 유람을 62세에서야 비로소 이루었으나 쾌활한 장관을 볼 수 없어서 매우 한탄스럽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62세라는 나이 탓에 무등산 곳곳을 둘러볼 수 없었음에서 나온 감정인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이정회「서석록」은 비교적 짧은 길이의 유산기이지만, 무등산의 특징인 주상절리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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