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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486
한자 戊午士禍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문안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498년 - 무오사화 발생

[정의]

1498년 훈구파(勳舊派)가 사림파(士林波)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역사적 배경]

훈구파는 성종 때 이후 등장한 신진 정치 세력인 사림파에 대비되는 용어이며,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정치 권력을 장악한 정치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세조 대에서 성종 대까지 여러 가지 관찬 사업(官撰 事業)에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공신전과 과전을 받아 대토지를 소유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의정부 정승과 판서 등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였다. 또한 인사권과 병권(兵權)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여 가문들끼리 결혼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등 세습적 지위를 확보해 갔다. 훈구파의 권력은 나이 어린 성종이 즉위한 이후 세조의 비 정희 왕후(貞喜王后)에 의해 섭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훈구파는 왕권 강화를 추진한 성종에 의해 등용된 사림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훈구파와 대립 국면을 조성하였다. 사림파는 3사(三司)[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언론직(言論職) 및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였다.

[경과]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 더욱 첨예화하였고, 이러한 대립과 반목은 1498년(연산군 4)에 이르러 정면으로 충돌을 하기에 이르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사초(史草)에 게재(揭載)한 것에서 발단이 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그것이다.

[결과]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욕을 당하였고,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에 처해졌다. 무오사화는 중앙의 권력 투쟁에 그치지 않고 지방 사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화순 출신의 정여해(鄭汝諧)[1450~1530]는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사화로 희생된 스승과 벗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508년(중종 3) 해망단(海望壇)을 설치하고 김종직·김굉필(金宏弼)[1454~1504]·정여창(鄭汝昌)[1450~1504]·김일손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동복 현감 송구(宋驅)[?~?] 역시 무오사화 때 모함을 받아 벼슬을 그만두고, 화순군 이서면의 물염 적벽 앞에 물염정(勿染亭)을 짓고 시를 읊으며 노후를 보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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