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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39
한자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7년 5월 1일연표보기 - 메이데이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47년 5월 1일연표보기 - 메이데이 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메이데이 기념식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
성격 사회 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선 노동 조합 평의회

[정의]

1947년 5월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메이 데이[노동절] 기념식을 하던 중 경찰의 급습으로 다수가 체포되었던 사건.

[역사적 배경]

미군정기 화순군에서의 좌익 활동은 1946년 10월 30일 화순 탄광 파업이 시작되며 극에 달했다. 11월까지 이어진 파업 중에 전라남도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른바 11월 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11월 봉기 중에 시위대들은 왕왕 행정 관서와 경찰 지서를 공격하면서 경찰과 유혈 사태를 빚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는 1946년 말에는 잦아들었다. 화순 탄광 파업도 11월에 이미 지도부의 체포로 와해된 상태였다.

1947년에 이르렀을 때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의 정치적 상황은 점차 미군정과 우익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이에 좌익은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1946년 11월 봉기와 같은 규모로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여 상황의 반전을 꾀했다.

화순 지역에서는 남면 사평리가 집회 장소로 선정됐다. 사평리는 일찍이 1914년 외남면이 창설됐을 때 면 소재지가 되었던 마을이었고 1932년 내남면과 외남면이 통합돼 남면이 생겼을 때 다시 남면 소재지가 되었다. 1900년대부터는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 마을이기도 하였다.

[경과]

사평리의 메이데이 기념식 집회는 앞서 1946년 화순 탄광 파업을 주도했던 조선 노동조합 평의회[약칭 전평] 계열의 인사들이 주도했다.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전평 계열의 광부들을 의미했다. 그밖에 인근 지역 농민들도 다수 참가했는데 이는 남로당이 남면·동면·한천면을 묶어 이른바 ‘화순 특구’로 부르며 세포 조직을 다져 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형식으로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경찰 무장 부대가 집회장을 급습했다. 집회는 해산되었고 급습 과정에서 수십 명이 체포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결과]

메이데이 사건으로 화순 지역의 좌익 활동은 크게 쇠퇴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1946년에서 1947년으로 해를 넘기며 좌익의 쇠퇴는 이미 뚜렷해진 상태였다. 메이데이 기념식을 사평리에서 개최하려고 시도했던 것 자체가 이런 쇠퇴를 암시한다.

화순군 남면 사평리는 화순 읍내에서 16㎞, 화순 탄광에서 8㎞ 떨어진 외곽이었다. 지역 정치의 중심지 또는 활동 거점을 피해 외진 시골 마을을 집회 장소로 택한 것이 이미 좌익의 주도권 상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메이데이 사건 후에 우익이 화순 읍내에서 2만 명을 동원해 반탁 집회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양상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의의와 평가]

이미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음에도 대규모 집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좌익이 광부 및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이 확인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좌익의 공개적인 활동은 더 이상 찾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좌익 활동가들은 이 사건 이후에 화순 지역의 산악으로 숨어 들어가 이후 산사람, 즉 빨치산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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