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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49
한자 四一九革命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장소 4·19 혁명 - 전라남도 화순군

[정의]

1960년 4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운동.

[시대적 배경]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집권 체제에 대한 염증은 6·25 전쟁 이후 조금씩 확산되어 갔다. 1954년 11월 이승만 정권은 권력 연장을 위해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을 헌법에서 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권은 야당 국회의원을 매수했고 개헌 통과에 필요한 국회의원 수를 임의로 해석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했는데 이는 국민적 비웃음과 적대감을 고조시켰다.

이승만 정권은 비판 세력을 좌익으로 몰거나 관제 시위를 일으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1958년 진보당을 와해시키고 1959년 정적인 조봉암을 사형시키면서 탄압의 강도를 더했다. 부정과 부패는 더욱 만연해 갔다.

[사건의 발단]

1960년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3·15 선거는 부패의 극단을 보여 주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4월 11일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최루탄에 숨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됐다.

[전개 과정]

화순 지역의 인근인 광주 지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4월 19일 광주 고등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거리로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승만 정권 반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후 광주 공업 고등학교·광주 농업 고등학교·숭일 고등학교·광주 상업 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당시 시위의 주역이었던 이홍길[전 전남 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시위의 준비와 진행에는 『사상계』 등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던 학생 서클이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

시위의 확산에 따라 희생자도 발생했다. 시위 첫날인 19일 오후 광주시 학동의 제1관구 사령부 근처에서 경찰의 발포로 광주시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18세인 강정섭이 피격당해 숨졌던 것이다. 그날 저녁 시위대가 광주 경찰서에 접근하자 경찰이 총기를 난사해 그곳에서 다시 7명이 사망했다. 이밖에도 전라남도에서는 목포·순천·영산포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화순 지역 상황과 평가]

4·19 혁명 당시 화순 지역에서는 이와 관련한 시위와 집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화순 지역의 도시화 수준이 낮고 학생 수가 적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 화순 지역에는 중등학교로 중학교 2곳만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화순 지역 학생들은 대부분 중학교·고등학교를 인접한 광주 지역으로 진학하곤 하였다. 결국 화순 지역의 민주화 역량은 인접한 광주 지역에 흡수되면서 4·19 혁명과 관련된 뚜렷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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