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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리 함양 박씨 집성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856
한자 寒溪里咸陽朴氏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한천 마을
집필자 최성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658년 - 함양 박씨 한천당 박유 한계리 한천 마을 입향
성격 집성촌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를 중심으로 세거하는 함양 박씨 집성촌.

[개설]

박유(朴瀏)[1627~1675]를 입향조로 하여 세대를 이어오는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함양 박씨 집성촌이다. 1658년(효종 9) 무렵 박유가 보성군 미력면 반룡 마을에서 청도 김씨와 혼인 후 한천 마을에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성품이 결백하여 속세에 뛰어나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글을 읽어 뜻을 구하여 도를 즐기고 고요함을 지켜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고을의 풍속이 변화하여 점점 순화되었다. 도암 이재(李縡)[1680~1746]가 갈명(碣銘)을 지어 극찬하였다.

[명칭 유래]

1789년 『호구총수』에 능주목 동면 한천리, 신암리, 1867년 『대동지지』에 능주목 금오면, 1895년 나주부 능주군 영내면, 1896년 전라남도 능주군 영내면, 1908년에 능주군 한천면, 1912년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 능주군 한천면 한천리, 신암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한천리와 신암동을 합하여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로 개편되었다.

한천 마을은 마을에서 동쪽으로 도덕산 아래에 찬샘이 있는데 샘의 이름을 따 찬샘골이라 하였는데, 입향조 박유가 이곳으로 이사와 살면서 당호를 한천당(寒泉堂)이라 한 이후 마을 이름을 한천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박헌가(朴獻可)[1713~1772]의 자는 성지(聖至)이고 호는 활효재(活孝齋)이다. 입향조 박유의 증손이다. 몸가짐과 품성이 뛰어나고 천성이 순효하니 세간에서는 8살짜리 효자라고 불렀다. 성장하여 이재(李縡)의 문하에 들어가 경의를 강론하고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니 선생이 항상 ‘내가 선생 노릇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라고 칭찬하였다. 효우와 도학의 겸함을 칭찬하여 호를 ‘활효재’라고 스승이 지어주고 이름을 호명하지 않고 항상 처사라고 불렀다. 박헌가가 작성한 ‘예설변론’이 이재가 지은 『사례편람(四禮便覽)』 속에 실려 있다. 시국의 폐단을 교정하고 왕도의 득실에 대하여 상소한 내용이 여러 가지 구절이 있다. 당시 대재(大齋) 유언집(兪彦鏶),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늑천(轢泉) 송명흠(宋明欽),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문충공 유언호(兪彦鎬) 등과 교분을 쌓았다. 1812년(순조 12)에 동몽교관으로 추증되고 사림에서 보성 유산사에 추배하였고, 문집이 있다.

박현가(朴絢可)의 자는 극장(克章)이다. 청백리 박수지(朴遂智)의 후손이다. 도암 이재의 문인이다. 효우하고 화목하여 깊이 사림의 신망을 받았다. 일찍이 의산재(義山齋)에서 강론할 때에 과정을 세우고 시를 지어 가로되 ‘산을 만들고 우물을 파매 그칠 곳에 그칠 것이니 그 높이는 아홉 길이고 그 깊이도 아홉 길이다. 사람의 병은 대개 중도에 폐지하는 것에 있으니 성인의 말씀에 마땅히 근원을 행해서 찾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사림의 천거가 있었다.

박도한(朴道漢)은 지조가 견실하고 효우를 독실하게 행하였다. 사서육경을 두루 관통하였으며 덕기를 성취하였다.

[자연환경]

한천 마을은 도덕산을 뒷산으로 하는데 이곳에는 범바위가 있다. 남북쪽 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한천면 오음리에서 흘러오는 냇물과 정리 및 결우리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면소재지이다. 동쪽으로 찬샘이 있으며 서쪽으로 금전저수지가 있는데 이곳을 돗바다들이라 부른다. 남쪽으로는 노우치와 앙마등이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33가구 61명이 함양 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76년에 건립한 한천당 박공유 유허비가 있으며 1840년에 건립한 함양 박씨 재실인 한천재(寒泉齋)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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