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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241
한자 金采萬
이칭/별칭 속골명창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세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5년연표보기 - 김채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김채만 원각사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김채만 창극단 협률산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김채만 통정대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김채만 사망
출생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거주|이주지 광주시 서구 효덕동 구암촌
거주|이주지 전라남도 강진군
성격 판소리 명창
성별
대표 경력 통정대부(通政大夫)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출신의 판소리 명창.

[활동 사항]

김채만(金采萬)[1865~1911]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태어나, 후에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효덕동 구암촌인 광주의 속골로 이사했다. 김채만이날치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는데, 본래 성음이 탁하고 평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김채만이 성공하기까지 많은 일화를 남겼다.

동문인 박창섭(朴昌燮)은 음악적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타고난 성음에 성량이 풍부해서 장래의 명창으로 촉망 받았다. 김채만은 열심히 노력하고 연마하였지만 박창섭을 따라갈 수 없었으므로 탄식 끝에 스승에게 하소연하자, 이날치는 "수만독하면 자연히 소리의 이면을 알게 되고 득음하면 명창이 되리라."하고 김채만을 격려해 주었다.

김채만은 10년 동안 불철 주야 각고의 수련을 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세상에 나와 전라 감사 이재각(李載覺)의 부름을 받고 선화당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송만갑과 소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송만갑이 선배인 만큼 김채만이 먼저 소리를 하였다. 김채만의 성음이 탁하여 능히 좌중을 휘어잡지는 못하여도,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맛있고 구성진 소리'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송만갑은 타고난 화성으로 냅다 소리를 질러 청중을 잡고 흔들어 사방에서 얼씨구 타령을 연발했다. 송만갑은 시원스러운 소리인데 비하여 김채만의 소리는 좀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성음인 것이다. 송만갑의 소리가 끝나고 다시 김채만의 차례가 되었는데 이감사는, "김명창은 그만두고 송명창 소리를 한 번 더 듣기로 하자." 하였다. 김채만은 무안을 톡톡히 당한 셈이니 속으로는 분하고 절통하였으나, 언감 생심 전라감사인데 어찌할 수 없어 물러났다.

그 길로 광주 속골로 돌아와서 이를 갈며 다시 소리를 연마했다. 목침보다 두 배나 더 큰 대추나무 죽비 3개가 북채에 닳아서 두 토막이 나도록 3년 동안 이른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죽어라고 소리를 계속했다. 마침내 그 탁했던 성음은 수리성으로 다져지면서 소리에 윤기가 흐르고 귀성이 끼게 되니, 사람들 모두 명창의 소리라 하며 탄복했다고 한다.

1902년 김창환의 권유로 상경하여 한동안 원각사에 참여했고 그의 주선으로 고종 앞에서 소리를 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창극단 협률사(協律社)에서 창극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한일합방의 비보를 접하고 협률사가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써, 그의 문하에서 박화섭(朴化燮), 한성태(韓成泰), 신용주(申用株), 박종원(朴宗元), 김정문(金正文), 공창식(孔昌植), 박동실(朴東實) 등의 명창이 배출되었다.

김채만의 장기는 「심청가」로 당대의 독보적인 소리였다. 특히 「심청가」의 첫 머리인 ‘심봉사를 소개하는 대목’은 그의 특별한 장기였다. 이와 같은 김채만의 소리는 그의 많은 제자들에 의해 후세에 남겨져 서편제의 판소리 법제가 남겨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상훈과 추모]

1902년 고종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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