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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921
한자 喪禮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집필자 한미옥

[정의]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상중(喪中)에 행하는 의례.

[개설]

상례는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이다. 상례는 죽음을 현실로 수용하는 초종시의 의례, 시신을 처리하는 습과 염의 의례,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발인과 매장에 따르는 의례, 상주들이 현실 사회로 복귀하는 매장 후부터 탈상까지의 과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례는 화순 지역뿐만 아니라 여타의 지역에서도 다른 예(禮)에 비하여 엄숙하고 정중하며 전통적인 의식 절차를 비교적 충실하게 지켜왔다.

현재 화순 지역에서 상례는 과거와 같이 집안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장례식장과 같이 상업화된 장소에서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따라 상여보다는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영구차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례식장을 이용하면서도 여전히 상여를 사용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장례식장의 도입에 따라 전통적인 상례 절차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지만, 구체적인 상례의 절차는 크게 변화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시대 이전의 상례에 대해서는 장례에 대한 약간의 기록과 현존하는 고분의 발굴 결과로 알 수 있는 묘제(墓制)를 통하여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보면 고려 시대까지의 상례는 대체로 무불(巫佛)의 습합에 의해 행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말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유교식 상례가 확산되는 한편, 민간에서는 무속적인 상례가 지속적으로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식 상례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구체적인 시기는 고려 충렬왕 시대에 안향(安珦)에 의하여 『주자전서(朱子全書)』가 들어오고 『가례』도 함께 연구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상례를 포함한 유교식 관혼상제의 사례가 지배층에 의하여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민간에까지 유교식 상례가 확산되어 현재까지 유교식 상례가 관행처럼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자 일부에서는 기독교식 상례가 행하여지고, 한편으로는 1912년에 발표된 「화장취체규칙(火葬取締規則)」에 의하여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대도시에서 활발히 이용되었으며, 사회 운동 단체의 합동장이나 사회장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1934년에 발표한 의례 준칙과 1961년의 의례 준칙, 1969년의 가정 의례 준칙의 제정 등은 상례의 절차와 상복제(喪服制)를 대폭 간소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오늘날 도시 사회에서는 도시적 생활양식에 대한 적응 결과로 장의사가 상례를 담당하게 되고, 공동묘지나 화장장의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유교식 상례가 간소화되었다.

[절차]

전통적인 화순의 상례 절차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초종례(初終禮)

1) 임종

환자가 임종(臨終)할 기미가 보이면 먼저 큰방으로 옮겨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머리를 북향으로 하여 정침을 시키고 몸에 지닌 쇠붙이를 빼어놓는다.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이때 자손들은 조용한 가운데 임종을 지켜보는데 이를 ‘종신한다’고 한다. 만일 유언이 있으면 자손들이 모여 앉아 유언을 듣거나 옆에서 받아 적는다.

흔히 사람이 죽기 전에 먼저 혼불이 나간다고 한다. 이를 ‘불나간다’ 또는 ‘혼불 나간다’고 한다. 타고난 수명을 다 살고 가는 노인의 경우 본인이나 혹은 이웃 사람에 의해서 혼불 나가는 것을 보는 수가 있는데 반딧불 같은 것이 크게 빛나며 올라간다고 한다. 이 혼불이 나가면 석 달 이상을 살 수 없다고 한다. 화순군 청풍면 풍암리의 사례를 보면, ‘남자 불은 끄터리가 없고 여자 불은 대비 자루 형태로 끄터리가 있다’고 한다.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에서는 까마귀나 여우가 그 집을 향하여 우는 것도 죽음을 미리 알리는 조짐이라고 한다.

사망을 확인하는 방법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입 위의 인중에 새 솜을 놓아서 그 움직임을 보고 숨이 끊어졌는가를 확인한다. 사망이 확인되면 자손들은 곡을 하는 한편, 지체하지 않고 일가친척들에게 연락하는 등 몇 가지 조치를 취한다. 먼저 서럽게 곡을 하고 직계 자손들은 머리를 풀고 버선을 벗고 맨발을 한다. 그리고 유복자들은 소복으로 갈아입고 남자는 흰 두루마기를 입는데 부친상일 경우에는 오른쪽 소매를 빼고 모친상일 경우는 왼쪽 소매를 뺀다. 만일 외지에서 부음을 받고 올 경우에는 동네 밖에서 곡하면서 신발을 벗어들고 산발한 채로 들어온다. 또 청풍면 신리에서는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를 들여다본 후 시신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 해가 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2) 수시

수시(收屍)는 시신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임종이 확인되면 코와 입을 솜으로 막고 시신이 굳기 전에 재빨리 시신의 양쪽 엄지발가락을 삼실로 묶고 발바닥을 벽에 대어 시체를 바르게 하고 양쪽 엄지손가락을 삼끈으로 묶어서 연결시켜 시신을 바르게 한다. 그리고 시신을 일곱 군데로 묶은 다음에 머리를 얇은 옷으로 괴고 시판 위에 올려놓고 당목으로 만든 홑이불로 덮어놓는다. 시판이란 시신을 올려놓는 판을 말한다. 시판은 대(竹)나 저릅대로 만드는데 화순에서는 시판을 저릅대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삼 농사를 많이 짓지 않기 때문에 대를 쪼개서 쓴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백아면 서유리의 사례처럼 송판을 쓰는 경우도 있다.

3) 고복

복은 망인의 혼이 돌아오도록 부르는 의식으로 고복(皐復) 또는 초혼(招魂)이라고 한다. 이는 자식 된 도리로 망인의 영혼이 돌아오도록 간절히 부르는 의례이다. 식구 중에 한 사람이 집안의 높은 곳이나 지붕 위에서 북쪽을 향하여 고인의 웃옷을 돌리면서 고인의 주소와 이름을 부른 다음, ‘복 복 복’하고 크게 외치거나 택호를 부르면서 돌아가셨다고 외친 다음 그 옷을 지붕 위에 던져둔다. 백아면 서유리의 사례를 보면, “해동 조선 전라남도 화순군 00면 00리 000 돌아와서 옷 가져가시오. 복, 복, 복.”이라고 외친다. 고복을 한 후 지붕 위에 던져두지 않고 바로 방으로 가져오기도 한다. 지붕 위에 던져놓은 경우에는 대렴이 끝나면 옷을 내려 태우기도 한다.

4) 사자상

고복이 끝나면 사자상(使者床)을 차린다. 사자상은 망인을 저승까지 인도하는 신, 즉 저승사자를 위하여 차리는 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금방 죽은 망인을 저승까지 잘 인도해달라는 의미이다. 사자상에는 밥 세 그릇과 짚신 세 켤레, 동전, 소금 한 접시와 도라지나물을 올려 대문 밖에 차려놓기도 하고, 여기에다 간장이나 된장 콩자반 등을 더 놓기도 한다. 밥이나 짚신, 동전을 세 개씩 준비하는 이유는 사자가 천신(天神), 지신(地神), 인신(人神)의 세 명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장이나 된장, 소금, 콩자반 등을 놓는 이유로 도암면 도장리에서는 사자들이 자주 물을 들이키느라고 저승에 가는 길이 지체되기를 바라는 뜻이 있다고 해석한다.

5) 상주, 호상, 부고

수시와 고복 등의 절차가 끝나면 여자들은 머리를 풀고 발상한다. 발상이란 머리를 풀고 곡을 하여 초상을 알리는 일로서 아들과 출가 전의 딸과 며느리가 머리를 푼다.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에서는 출가한 딸은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머리를 풀지 않고 비녀만 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투를 틀지 않고 낭자나 댕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없다. 이어서 상주(喪主)를 세운다. 상주는 부모님일 경우 장자가 되고, 장자가 없으면 장손이 되며, 아들이 죽었을 때는 아버지가, 아내가 죽었을 때는 남편이 상주가 된다.

또 호상(護喪)을 결정하는데 보통 친척 중에서 상례에 밝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선정한다. 요즘은 망인의 친구나 마을 이장이 호상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호상이 하는 일은 부고(訃告)의 발송, 조객의 안내, 부의록 작성, 금품의 출납 등 상례 일체를 주관한다.

호상이 결정되면 부고꾼을 시켜 부고를 발송한다. 부고꾼에게는 여비와 담배 등을 주어 죽음을 알리도록 한다. 부고를 받은 집에서는 그것을 화장실 입구나 대문 밖에 보관한다. 이는 집안에 산고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집안으로 부고장을 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부고 발송은 전화로 대신하는 경우가 흔하다.

2. 습렴

습(襲)은 시신을 목욕시켜 일체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고, 염(殮)은 시신을 묶어 관에 넣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습과 염을 분리시켜 행했으나 요즘에는 한꺼번에 하는 것이 관행화되었다.

습의 과정은, 먼저 시신을 시판 위에 놓은 채 수시했던 끈을 풀고 옷을 벗긴다. 이때는 시신을 삼베나 한지, 홑이불로 가리고 옷을 벗긴다. 그런 다음 목욕시키는데 자식들이 하며 남자는 아들이, 여자는 딸이나 며느리가 한다. 화순에서는 향나무 삶은 물을 사용하여 목욕시킨다. 목욕의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씻겨 내려가는데 먼저 머리에 향물을 묻혀서 빗으로 빗기고 남자는 상투를, 여자는 낭자를 한다. 근래에는 얼굴, 손, 발에 향물을 몇 번 찍어 바르는 정도로 목욕을 끝낸다.

목욕이 끝나면 수의를 입힌다. 수의는 가계가 넉넉하면 미리 마련해두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상을 당하여 장에 가서 삼베를 사다가 큰며느리가 만드는데 생시에 입던 옷과 같이 풀을 먹이고 다려서 입힌다. 그러나 요즘은 집에서 만들지 않고 장의사에서 사다 입히는 일이 많다. 수의를 입힐 때는 홑이불의 네 귀를 사방에서 잡거나 한지로 위를 가려 시신이 보이지 않게 하고 속옷, 적삼, 고의, 도포, 두루마기를 입히고 버선을 신기고 행전과 대님을 치고 손에는 주머니 모양의 악수를 끼우고 얼굴은 면건을 덮는다. 수의의 속옷과 겉옷의 안 베는 마포로 하고 겉 베는 당목으로 만든다. 그러나 빈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리고 여자는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에다 분을 발라서 화장을 하고 연지를 찍고 머리는 낭자를 해서 금봉채를 찌르거나 향나무 비녀를 찌른다. 옛날에는 원삼을 입히고 족두리를 씌우기도 했는데, 족두리가 없을 경우에는 남색 베로 만든 ‘남바우’를 씌웠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 가리개로 얼굴을 가리는데 이를 ‘주둥다리’ 또는 ‘낯쌍개’라고 하며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청홍색의 베로 만들며 끈을 달아 뒤로 묶는다.

수의를 입힌 다음 반함(飯含)을 한다. 반함은 물에 불린 쌀을 갯버들나무로 만든 수저로 입에다 세 번씩 떠 넣고 동전이 있으면 동전도 세 개 넣고, 준주를 넣기도 한다. 화순군 이양면 구례리의 사례를 보면, 버드나무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은 버드나무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기 때문이며, 동전은 오래도록 썩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준주는 가재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진주에 준하는 것이기에 반함할 때 넣는 것이라고 한다. 반함이 끝나면 시신 앞에 병풍을 치고 상을 차려놓는다.

수의를 입히고 반함을 한 다음 염을 한다. 염은 습한 시신을 싸서 묶는 소렴과 이를 입관하는 대렴이 있다. 요즘은 삼일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때는 사망한 다음날 입관하므로 이런 절차가 뚜렷한 구분이 없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염할 때는 시신을 일곱 매듭으로 묶는다. 먼저 마포로 시신을 싼 다음 삼노끈으로 일곱 매듭을 묶는데 먼저 발끝에서부터 위로 세 매듭 묶고, 다음에 머리 쪽에서부터 아래로 세 매듭을 묶고, 마지막으로 가운데를 묶는다. ‘대발쌈’을 하는 경우에도 시신을 일곱 매듭으로 묶는데 묶는 방법은 위와 같다. 습이 끝난 다음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망인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면 입관한다.

입관하는 것을 대렴이라고 한다. 입관하는 시기는 오일장일 경우 삼일 째 되는 날 하고, 삼일장일 경우에는 이일 째 되는 날 한다. 그러나 유족들 중 미처 상가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망인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도록 입관을 늦추기도 한다. 먼저 준비된 관을 마당 한쪽에 두었다가 입관 때가 되면 방안으로 들여놓는다. 먼저 관 바닥에 지금을 까는데 이는 관 바닥에 까는 홑이불을 말하며, 대개 삼베로 만든다. 이때 부유한 경우에는 홑이불을 안과 겉을 대서 두 겹으로 하여 만들고 그렇지 못하면 한 겹으로 한다. 시신을 관에 넣을 때는 머리 부분과 발을 한 사람씩 들고 가운데를 받쳐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하여 입관한다. 그리고 머리, 어깨, 허리, 다리 등이 빈 곳을 망인의 옷으로 채우고 습할 때 깎은 손톱, 발톱, 머리털을 담은 주머니를 각각 방위에 따라 넣는다. 이런 절차가 끝나면 망인을 마지막 보기 때문에 상주와 주부 등 생인들은 실컷 곡을 한다. 곡이 끝나면 천금이라 하여 삼베로 만든 홑이불을 덮고 관 뚜껑을 덮는다.

입관이 끝나면 널 위에 남자는 ‘모관모공지구(某貫某公之柩)’, 여자는 ‘모봉모씨지구(某封某氏之柩)’라고 쓰거나 단순히 관의 상과 하만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왼새끼를 꽈서 일곱 매듭으로 관을 묶는다. 그런 다음 관은 방안에 그대로 놓아두고 병풍을 친다.

3. 혼백, 영좌

입관 후 문상 온 손님들을 위하여 혼백(魂帛)을 만들어 영좌(靈座)에 안치한 제청을 만든다. 제청은 상청이라고도 한다. 혼백은 삼색 실로 우물정자를 만든 것으로 이것을 넣은 상자를 혼백상자라 한다. 요즘에는 망인의 사진을 놓기도 한다. 그리고 영좌를 영틀이라고 하는데 의자처럼 만들되 다리를 길게 하고 자리에다 혼백상자를 놓고 전면을 한지로 가려 열고 닫을 수 있게 한다. 상 위에는 위패, 혼백상자, 초, 향, 망인이 평소에 아끼던 물건 등을 놓는다. 제청은 주로 마루에다 만들고 때가 되면 생시와 같이 밥과 국을 올려놓고 숭늉도 올리고 담배도 피워 놓는다.

4. 성복, 문상

성복(成服)은 상복을 입는 절차다. 상주들은 지금까지 입었던 통건과 소복을 벗고 복제에 따라 상복을 입고 성복제(成服祭)를 지낸다. 입관을 하고 나면 자식들은 큰아들부터 차례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상복을 만들 때 부친상이면 옷 바느질 갓을 밖으로 내서 하고, 모친상일 때는 바느질 갓을 안으로 접어서 평상복처럼 하므로 상복을 보고서 구별할 수 있다. 또 지팡이 손잡이는 짚으로 싼다. 부친상일 경우에는 대(竹)로 만들고 모친상일 경우에는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든다. 이유는 아버지는 속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대로 만들고 어머니는 속이 꽉 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복을 입으면 성복제를 지낸다. 관 앞에 병풍을 치고 제상을 차리고 맏상주부터 차례로 잔을 올리고 곡하고 재배한다.

성복을 하고 제청이 마련되면 조문객을 맞는다. 이때 조문객들은 먼저 혼백상 앞에서 곡한 다음 재배하고 생인들과 맞절을 한 다음 애도하는 뜻의 말을 전한다. 생인들은 조객이 곡을 하고 재배를 할 때 곡을 한다.

5. 발인

유해가 장지를 향해 집을 떠나는 절차를 발인(發靷)이라고 한다. 화순 지역에서는 대개 관을 밖으로 내온 후 발인제를 지내는데, 방 안에서 관을 밖으로 내는 절차는 여섯 사람이 당목으로 결관한 관을 들고 곽 머리로 방의 네 구석을 찧으면서 ‘복, 복, 복’하고 소리친 후 곽 머리부터 밖으로 내온다. 관을 내올 때 문턱 위에 놓인 바가지를 깨거나 톱으로 문턱을 치거나 조금 자르면서 나온다. 상주로부터 분향한 후 술잔을 따르고 재배하는 식으로 발인제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집안에 어른이 계신 경우 상여를 세 번 들었다 놓았다 하는 식으로 안방을 향해 하직 인사를 한다.

발인제가 끝나면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집을 떠난다. 상여를 ‘생애’, ‘생이’라고 부르는데 옛날에는 마을마다 공동으로 쓰는 꽃상여가 있었다. 그 상여는 상엿집에 보관했었지만 지금은 보통 장의사에서 사다가 사용하고 장례가 끝나면 태워버린다. 상여는 보통 12명 이상의 상여꾼들이 멘다. 상여의 행렬은 명정, 공포, 만사지, 혼백상, 설소리꾼, 상여, 상주, 유복 친지, 조객의 순으로 나간다.

상여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의례를 치른다. 평소 망인이 즐겨 다니던 곳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을 상여가 지나간다. 또 상여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마을을 하직하는 의미로 제를 지낸다. 이것을 ‘노제’ 또는 ‘거릿제’라고 한다. 노제는 마을 입구나 좀 떨어진 적당한 장소에 상여를 내려놓은 다음 제물을 차리고 상주로부터 순서대로 잔을 올린다. 이때 미처 조문을 못한 사람들은 문상할 수 있다. 노제를 지내면 안상제들은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한다.

한편 상여가 출발하기 전에 미리 사람을 보내 매장 준비를 한다. 지관과 산일에 능한 사람이 당일 아침 집안의 청장년을 데리고 가서 묘의 방향을 잡고 산일을 시작하기 전에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를 지내기 위한 제물은 주로 술과 과일, 명태 정도다. 상여가 도착하고 하관 시간이 되면 지관이 하관을 명한다. 이때 살이 있는 사람은 하관하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 하관을 하고 이어서 봉분을 만들고 평토제를 지낸 다음 집으로 돌아온다.

6. 기타 장속(葬俗)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초분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화순 지역에 초분의 관습이 없어져서 볼 수 없다. 초분 할 때도 역시 장례 절차와 같지만 다만 땅을 파고 매장하지 않고 집 가까운 밭이나 산자락에 자리를 정하여 관을 놓고 초가지붕처럼 마람을 둘러놓았다가 3~5년이 지나면 날을 받아 이장한다. 많은 마을에 ‘초분골’이라는 명칭이 있는 것은 옛날 초분을 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어린 아이 시체를 땅에 묻을 경우는 짐승이 시체를 파먹지 못하도록 돌을 가져다 쌓아 놓는데 이러한 것을 ‘독장’또는 ‘아그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혼의 처녀가 죽으면 산에 묻지 않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삼거리에 엎어서 묻는다. 사람이 많이 다닌 곳에 묻어야 처녀의 원혼이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때는 바늘을 처녀의 옷깃에다 꽂아두거나 체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목에 거울을 걸어주기도 한다.

7. 흉제

매장 후부터 길제(吉祭)까지의 제사를 흉제(凶祭)라 한다. 이는 혼백을 산에서 반혼(返魂)하여 지내는 반혼제에서부터 탈상까지의 제사를 의미하며 이 기간이 끝나면 상주는 일상으로 복귀한다. 옛날 예법이 엄격했을 때는 이 시기에 상주가 묘 곁에 움막을 짓고 시묘하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하였으며 실제로 그러한 사례들이 많았다. 오늘날 시묘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주는 매사를 근시하며 망인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것을 도리로 여기고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사항]

화순 지역에서는 집에서 혼불이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에서 사람이 죽는다고 여긴다. 대체로 남자 혼불은 끝 모양이 확실하지 않게 사라지며, 여자 혼불은 대빗자루 형태로 끝 모양이 있다고 한다. 또한 과거부터 사람이 죽으면 먼저 구들장이나 굴뚝을 막았는데 이는 구들장이나 굴뚝에 고양이가 들어가면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본래 화순 지역에서는 상가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기 때문에 팥죽을 쒀서 부조를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0.06 내용수정 북면-> 백아면
이용자 의견
윤** 2020년 1월 1일부터 북면에서 백아면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수정해주세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 완료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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