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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 향교 공덕비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2129
한자 綾州鄕校功德碑群
이칭/별칭 선정비,불망비,휼민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교촌길 32-2[남정리 328]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공적비[선정비, 불망비, 혜휼비]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교촌길 32-2[남정리 328]지도보기
성격 조선 시대~개항기 지방관 등의 공적비
양식 석비
관련 인물 능성 현령, 능주 목사, 능주 군수 외
재질 석재
크기(높이,너비,두께) 총 높이 155㎝, 비신 높이 150㎝, 너비 65㎝, 두께 19㎝[관찰사 이근호 불망비]|총 높이 183㎝, 비신 높이 120㎝, 너비 5㎝, 두께 18㎝[목사 김원립 청덕 선정비]|총 높이 138㎝, 비신 높이 122㎝, 너비 77㎝, 두께 11㎝[목사 김광혁 청덕비]|총 높이 113㎝, 비신 높이 103㎝, 너비 43㎝, 두께 14㎝[목사 이시담 선정비]|총 높이 180㎝, 비신 높이 118㎝, 너비 43㎝, 두께 21㎝[목사 곽성구 청덕 선정비]|총 높이 166㎝, 비신 높이 106㎝, 너비 47㎝, 두께 16㎝[목사 신열도 선정비]|총 높이 160㎝, 비신 높이 150㎝, 너비 55㎝, 두께 25㎝[목사 신유익 영세 불망비]|총 높이 182㎝, 비신 높이 96㎝, 너비 28㎝, 두께 3㎝[목사 조사충 영세 불망비]|총 높이 186㎝, 비몸 높이 164㎝, 너비 44㎝, 두께 13㎝[목사 남인구 청덕 애민 선정비]|총 높이 186㎝, 비신 높이 122㎝, 너비 57㎝, 두께 17㎝[목사 이해 청덕 인화비]|총 높이 115㎝, 비신 높이 105㎝, 너비 47㎝, 두께 18㎝[목사 이교영 선정비]|총 높이 156㎝, 비신 높이 148㎝, 너비 61㎝, 두께 22㎝[목사 한치조 영세 불망비]|총 높이 144㎝, 비신 높이 132㎝, 너비 50㎝, 두께 15㎝[목사 이응우 청덕 애민 선정비]|총 높이 135㎝, 비신 높이 97㎝, 너비 42㎝, 두께 10㎝[목사 이호철 휼민 선정비]|총 높이 200㎝, 비신 높이 130㎝, 너비 46㎝, 두께 20㎝[목사 서완순 선정비]|총 높이 197㎝, 비신 높이 145㎝, 너비 54㎝, 두께 25㎝[현령 선시중 선정비]|총 높이 168㎝, 비신 높이 133㎝, 너비 46㎝, 두께 15㎝[현령 임옥산 청덕 선정비]|총 높이 190㎝, 비신 높이 112㎝, 너비 55㎝, 두께 20㎝[현령 이언양 영세 불망비]|총 높이 158㎝, 비신 높이 125㎝, 너비 58㎝, 두께 22㎝[현령 윤수 청덕 선정비]|총 높이 120㎝, 비신 높이 114㎝, 너비 55㎝, 두께 19㎝[현령 한여직 청덕 선정비]|총 높이 114㎝, 비신 높이 105㎝, 너비 54㎝, 두께 15㎝[군수 이범구 선정]|총 높이 120㎝, 비신 높이 110㎝, 너비 45㎝, 두께 17㎝[군수 김병도 숭유 흥학비]|총 높이 100㎝, 비신 높이 74㎝, 너비 42㎝, 두께 16㎝[군수 박용훈 영세 불망비]|총 높이 180㎝, 비신 높이 115㎝, 너비 40㎝, 두께 16㎝[군수 손인용 영세 불망비]|총 높이 208㎝, 비신 높이 178㎝, 너비 63㎝, 두께 32㎝[우국지사 조준기 기적비]|총 높이 150㎝, 비신 높이 125㎝, 너비 50㎝, 두께 13㎝[소사 상옥 보시 불망비]|총 높이 190㎝, 비신 높이 140㎝, 너비 52㎝, 두께 23㎝[주찬형 창선 기공비]|총 높이 240㎝, 비신 높이 160㎝, 너비 54㎝, 두께 23㎝[주기준 선생 순국 영모비]
소유자 능주 향교
관리자 능주 향교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의 능주 향교 앞에 있는 조선 시대부터 개항기까지의 역대 지방관 및 지역 유공자의 공적비.

[개설]

조선 시대 지방 교육 기관인 능주 향교 입구에 역대 능성 현령·능주 목사·능주 군수·전라도 관찰사의 선정비·청덕비·휼민비 등의 공적비가 모여 있다. 또한 향교와 연관된 하마비나 향교 중수비도 있으며, 지역 구제를 한 인물들과 관련된 비도 있다. 향교 입구에 33기, 외삼문 곁에 6기, 향교 입구 산기슭에 2기 등 모두 41기이다. 이 가운데 조선 시대~개항기의 지방관 공적비는 향교 입구에 있는 33기 가운데 24기이며, 전라도 관찰사비는 1기이다. 지방관 공적비 24기 가운데 능성현 시기[1392~1632]의 현령 공적비 5기, 능주목 시기[1632~1895]의 목사 공적비 15기, 능주군 시기[1895~1914]의 군수 공적비는 4기이다.

[건립 경위]

조선 시대 지방관의 임무는 수령칠사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 재임 중의 공적을 기려 관례적으로 선정 공적비를 세웠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재임 중에 세우기도 하였다. 능주는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독립된 고을로서 읍격을 유지해 왔는데 조선 시대에 능성현·능주목, 대한 제국 시기에는 능주군이라 하다가 1914년에 화순군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능주 향교 앞에 있는 지방관 공적비 24기는 능성현-능주목-능주군을 거쳐간 현령·목사·군수 등의 공적비로 재임 중이나 이임한 뒤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처음 세운 뒤로 오래되어 다시 세운 비도 있다. 1978년 당시에는 향교 건물 가까이 있거나 명륜당 곁에 모여 있었는데, 지금은 향교 입구로 옮겼다.

[위치]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능주 향교 앞에 있다. 향교 입구에 하마비 포함 33기, 외삼문 곁에 6기, 그리고 향교로 들어가는 개천의 교량인 명륜교를 건너기 전 산기슭에 2기가 있다.

[형태/금석문]

공적비의 형태는 호패형이 12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 공적비가 5기, 비의 몸과 머리가 별석이면서 머리가 한옥 지붕 모양으로 된 비석은 13기, 머리에 화문을 조식한 것은 2기이다. 귀부를 갖춘 비는 전체 33기 가운데 2기이다. 그 밖에 쇠로 된 비 1기가 있다.

1. 하마비

자연석 좌대 위에 비의 몸을 세운 호패 형 석비로 앞면에는 내려쓰기 1행으로 ‘하마비(下馬碑)’라 음각으로 새겼다. 하마비는 궁궐이나 능원, 성균관, 향교 등 국가의 존엄을 상징하는 곳에서는 예를 갖춰 말을 내려서 가도록 하는 규정에 따라 건립한다.

2. 관찰사 이근호 불망비

장방형 좌대에 홈을 파서 비의 몸을 세우고 머리는 따로 갖추지 않은 호패형 석비이다. 개항기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낸 이근호(李根澔)[1860~1923]의 불망비로 재임[1906. 2~1903. 8] 이후인 1904년 2월에 세웠다. 앞면에 “관찰사 이공근호 불망비(觀察使 李公根澔 不忘碑)”, 뒷면에 연기 갑진(甲辰)을 기록하였다. 총 높이 155㎝, 비신 높이 150㎝, 너비 65㎝, 두께 19㎝이다.

3. 목사 김원립 청덕 선정비

1635년(인조 13) 12월에 부임하여 1640년 2월까지 재임한 김원립(金元立) 목사의 청덕 선정비이다. 장방형 좌대 가운데에 홈을 파서 비의 몸을 세웠는데 화문을 조식한 머리와 한 몸이다. 앞면에 “목사 김공원립 청덕선정비(牧使 金公元立 淸德善政碑)‘라 새겼다. 총 높이 183㎝, 비신 높이 120㎝, 너비 5㎝, 두께 18㎝이다.

4. 목사 김광혁 청덕비

1641년 1월부터 1643년 2월까지 재임한 김광혁 목사의 공적비이다. 장방형 좌대 가운데에 홈을 파서 비의 몸을 세웠는데 화문을 조식한 머리와 한 몸이다. 앞면 가운데에 “목사 김공광혁 청덕□□□(牧使 金公光爀 淸德□□□)”이라 새겼다. ‘덕(德)’ 이하 글씨 부분은 보이지 않지만 ‘선정비(善政碑)’로 보인다. 앞면 향좌측에 “갑인사원 일(甲申四月 日)”의 연기가 있어 1644년(인조 22) 4월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138㎝, 비신 높이 122㎝, 너비 77㎝, 두께 11㎝이다.

5. 목사 이시담 선정비

1646년 5월부터 1648년 1월까지 재임한 이시담(李時聃) 목사의 선정비이다. 화강석 신재로 좌대를 마련하고 홈을 파서 호패형 비몸을 세웠다. 앞면에 “목사 이공시담 선정비(牧使 李公時聃 善政碑)”라 내려쓰기 음각으로 새겼다. 총 높이 113㎝, 비신 높이 103㎝, 너비 43㎝, 두께 14㎝이다.

6. 목사 곽성구 청덕 선정비

1650년(효종 1) 5월부터 1652년 10월까지 재임한 곽성구(郭聖龜) 목사의 청덕 선정비이다. 장방형 좌대 가운데에 홈을 파서 비의 몸을 세웠는데 화문을 조식한 머리와 한 몸이다. 앞면 가운데에 “목사 곽공성구 청덕선정비(牧使 郭公聖龜 淸德善政碑)”, 향우측에 “순치구년십일월 일(順治九年十一月 日)’이라는 연기를 새겨 이임 뒤인 1652년 11월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180㎝, 비신 높이 118㎝, 너비 43㎝, 두께 21㎝이다.

7. 목사 신열도 선정비

1652년 11월부터 1653년 6월까지 재임한 신열도(申悅道) 목사의 선정비이다. 장방형 좌대 가운데에 홈을 파서 비의 몸을 세웠는데 화문 조식을 한 머리와 한 몸이다. 앞면에 “목사 신공열도 선정비(牧使 申公悅道 善政碑)”라 내려쓰기 음각으로 새겼다. “신사육월 일 구대손□□(辛巳六月 日 九代孫□□)”의 내용이 있어 후대에 개수한 비임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166㎝, 비신 높이 106㎝, 너비 47㎝, 두께 16㎝이다.

8. 목사 신유익 영세 불망비

1722년(경종 2) 9월부터 1723년 4월까지 재임한 신유익(愼惟益)[1671~1733] 목사의 영세 불망비이다. 장방형 화강석 좌대 위에 비의 몸을 세우고 화문을 조식한 머리를 얹은 현대비이다. 앞면에 “목사 신후유익 영세불망비(牧使 愼侯惟益 永世不忘碑)”, 좌우에 “백리안녕 만세송덕(百里安寧 萬世頌德)”이라 새겼다. “숭정기원후 재계묘(崇禎紀元後再癸卯)”라는 원비의 연기를 새기고 있어 원래는 1723년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989년 3월에 다시 세우면서 신유익 목사의 행적을 기록한 추기를 국한문 12행으로 새겼는데 후손인 신일범(愼日範)이 글을 짓고 신직범(愼直範)이 글씨를 써서 충청남도 부여군 거창 신씨 신탑 종중(忠淸南道扶餘郡居昌愼氏新塔宗中)에서 세웠다. 당시 전교는 김규호(金圭浩)이다. 총 높이 160㎝, 비신 높이 150㎝, 너비 55㎝, 두께 25㎝이다.

9. 목사 조사충 영세 불망비

1781년(정조 5) 윤5월 부임하여 8월까지 재임한 조사충(趙思忠) 목사의 영세 불망비로 드물게 남아 있는 철비이다. 장방형 자연석을 다듬어 1단의 받침을 두고 홈을 파서 철비를 세웠다. 비의 몸 가장자리에 테를 두른 형태를 하여 비문 있는 부분은 마치 위패로 보인다. 비의 머리는 몸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데 약간의 조식을 하였다. 앞면 가운데에 “목사 조공사충 영세불망비(牧使 趙公思忠 永世不忘碑)”, 좌우로 “삼월리정 백리송화(三月莅政 百里頌化)”라는 송문을 새겼다. 재임 석 달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삼월리정(三月莅政)”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갑술오월 일 개건(甲戌 五月 日 改建)”이라는 연기가 있는데, 1814년(순조 14)에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총 높이 182㎝, 비신 높이 96㎝, 너비 28㎝, 두께 3㎝이다.

10. 목사 남인구 청덕 애민 선정비

1812년 12월부터 1816년 2월까지 목사로 재임한 남인구(南麟耉)의 청덕 애민 선정비로 재임 말기인 1815년 9월에 새웠다. 거북 좌대 위에 받침을 만들고 가운데 홈을 파서 비의 몸을 세웠다. 비의 머리는 한옥 지붕형이다. 앞면에 “목사 남후인구 청덕애민선정비(牧使 南侯麟耉 淸德愛民善政碑)”, 향좌측 아랫부분에 “가경이십년을해구월 일(嘉慶二十年乙亥九月 日)”이라는 연기를 새겼다. 총 높이 186㎝, 비몸 높이 164㎝, 너비 44㎝, 두께 13㎝이다.

11. 목사 이장우 영세 불망비

1850년(철종 1) 7월에 부임하여 1854년 4월까지 목사를 지낸 이장우(李章愚) 목사의 영세 불망비이다. 장방형 좌대 위에 비의 몸을 세웠다. 비의 머리는 한옥 지붕형이다. 앞면에 “목사 이후장우 영세부망비(牧使 李侯章愚 永世不忘碑)”, 좌우로 “비두평견 사왈민왈 혁폐균시 무지송지(畀斗平蠲 士曰民曰 革弊均施 舞之頌之)” 4언의 송문이 있다. “□해십일월(□亥十一月)”의 연기가 보인다.

12. 목사 이해 청덕 인화비

1856년 2월부터 1859년 5월까지 목사를 지낸 이해(李田奚) 목사의 청덕 인화비이다. 장방형 좌대 위에 비의 몸을 세웠다. 비의 머리는 한옥 지붕형이다. 앞면에 “목사 이후해 청덕인화비(牧使 李侯田+奚 淸德仁化碑)”라 가운데에 새기고, 좌우로 “화재인심 감의훈인 용기간석 불륵불린(化在人心 酣義醺仁 庸紀干石 不泐不磷)”이라는 4언 4구의 송문을 새겼다. 총 높이 186㎝, 비신 높이 122㎝, 너비 57㎝, 두께 17㎝이다.

13. 목사 이교영 선정비

1867년(고종 5) 7월 부임하여 1871년 7월까지 재임한 이교영(李喬榮) 목사의 선정비이다. 시멘트로 쌓은 장방형 좌대 위에 호패 형의 몸을 세웠다. 앞면 가운데에 “목사 이후교영 선정비(牧使 李侯喬榮 善政碑)”, 좌우에 “옥결염조 초언인풍 만구성비 백세송공(玉潔廉操 草偃仁風 萬口成碑 百世頌功)”이라는 송문을 새겼다. 뒷면에는 “壬申三月 日”의 연기가 있는데, 1872년에 세운 것이다. 총 높이 115㎝, 비신 높이 105㎝, 너비 47㎝, 두께 18㎝이다.

14. 목사 한치조 영세 불망비

1871년 7월 부임하여 1874년 4월까지 재임한 한치조(韓致肇) 목사의 영세 불망비이다. 장방형 좌대 위에 호패형의 몸을 세웠다. 앞면에 “목사 한후치조 영세부망비(牧使 韓侯致肇 永世不忘碑)”, 뒷면에 “갑술십월 일(甲戌十月 日)” 연기를 새겨 이임 후인 1874년 10월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156㎝, 비신 높이 148㎝, 너비 61㎝, 두께 22㎝이다.

15. 목사 이응우 청덕 애민 선정비

1880년 3월 부임하여 1881년 4월까지 재임한 이응우(李膺愚) 목사의 청덕 애민 선정비이다. 장방형의 좌대 위에 호패형의 몸을 세웠다. 앞면에 “목사 이후응우 청덕애민 선정비(牧使 李侯膺愚 淸德愛民 善政碑)”, 좌우로 “일념자자 기염차확 구부능명 파지금석(一念孜孜 旣廉且確 口不能銘 播之金石)”라는 송문이 있다. 뒷면에는 “신사정월 일(辛巳正月 日)”의 연기가 있는데 재임 말기인 1881년 1월에 세운 것이다. 총 높이 144㎝, 비신 높이 132㎝, 너비 50㎝, 두께 15㎝이다.

16. 목사 이호철 휼민 선정비

1883년 3월부터 1884년 6월까지 재임한 이호철(李鎬喆) 목사의 휼민 선정비이다. 장방형 좌대 위에 호패형의 몸을 세웠다. 앞면에 “행목사 이후호철 휼민선정비(行牧使 李侯鎬喆 恤民善政碑)”, 좌우로 “삼촌석포 육백금혜 덕부사민 택몽영세(三寸石砲 六百金惠 德孚斯民 澤蒙永世)”라는 송문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갑신오월 일(甲申五月 日)”의 연기가 있는데 재임 말기인 1884년 5월에 세운 것이다. 비문상의 ‘行’은 관계(官階)[계급]가 높고 관직[직책]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던 관직 용어이다. 총 높이 135㎝, 비신 높이 97㎝, 너비 42㎝, 두께 10㎝이다.

17. 목사 서완순 선정비

1891년 7월부터 1894년 7월까지 재직한 서완순(徐完淳) 목사의 선정비이다. 장방형 화강석 좌대 위에 오석의 몸을 세웠다. 머리는 한옥 지붕형인 현대 비이다. 앞면에 “목사 서후완순 선정비(牧使 徐侯完淳 善政碑)”, 좌우에 “숭교유흥 견렴서예 백폐구정 일방감어(崇敎儒興 蠲斂庶譽 百廢俱正 一方堪語)”라는 송문을 새겼다. 조선 고종 때 세웠던 것을 서완순 목사의 행적 기록을 추가[김규호 지음, 이백순 글씨]하여 1992년에 서정민(徐政珉)이 고쳐 세웠다. 총 높이 200㎝, 비신 높이 130㎝, 너비 46㎝, 두께 20㎝이다.

18. 현령 선시중 선정비

선시중(宣時中) 현령의 선정비이다. 장방형의 좌대 위에 오석의 몸을 세우고 비의 머리는 한옥 지붕형인 현대 비이다. 앞면에 “현령 선후시중 선정비(縣令 宣侯時中 善政碑)”, 좌우에 “정청사간 이회민복 유구불망 전석송덕(政淸事簡 吏懷民服 愈久不忘 鐫石頌德)”라는 송문을 새겼다. 뒷면에 “성화 정미수 단기사삼백육년 계축 개수(成化 丁未竪 檀紀四三百六年 癸丑 改竪)”라는 연기가 있어 1487년(성종 18)에 세운 것을 1973년에 고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197㎝, 비신 높이 145㎝, 너비 54㎝, 두께 25㎝이다.

19. 현령 임옥산 청덕 선정비

임옥산(林玉山) 현령의 청덕 선정비이다. 장방형 좌대 위에 비의 몸을 세우고 한옥 지붕형의 머리를 갖췄다. 앞면에는 “현령 임공옥산 청덕선정비(縣令 林公玉山 淸德善政碑)”, 좌우로 “이□치민 일인화속 덕겸은성 적저청백(以□治民 日仁化俗 德兼恩成 績著淸白)”이라는 송문을 새겼다. 뒷면에 “임인이월 일 십대손 흥원 영대 영방 개수 기해 삼월 일 십이대손 달형 정응 중수(壬寅二月 日 十代孫 興元 永大 永芳 改竪 己亥 三月 日 十二代孫 達馨 定應 重修)”라는 연기를 새겼다. 원래 세웠던 선정비를 임인년 2월에 10대손 임흥원, 임영대, 임영방이 고쳐 세웠다가 기해년 3월에 12대손 임달형, 임정응이 다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168㎝, 비신 높이 133㎝, 너비 46㎝, 두께 15㎝이다.

20. 현령 이언양 영세 불망비

이언양(李彦讓) 현령의 영세 불망비이다. 거북 좌대 위에 받침을 만들고 홈을 파서 비의 몸을 세웠다. 머리는 한옥 지붕형이다. 앞면에 “현령 이후언양 영세불망비(縣令 李侯彦讓 永世不忘碑)”, 좌우로 “정선흥학 유화대혜 치필만준 □□현집(政先興學 儒化對兮 治必萬遵 □□賢戢)”이라는 송문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 “계미 십이월 일 육대손 행□ 행□ 개수(癸未 十二月 日 六代孫 行□ 行□ 改竪)”라 하여 계미년 12월에 이언양 목사의 6대손이 고쳐 세웠다. 총 높이 190㎝, 비신 높이 112㎝, 너비 55㎝, 두께 20㎝이다.

21. 현령 윤수 청덕 선정비

1609년(광해군 1) 9월부터 1613년 9월까지 현령을 지낸 윤수(尹燧) 현령의 청덕 선정비이다. 장방형 좌대 위에 홈을 파서 호패형 몸을 세웠다. 좌대에는 연화문 등이 조식 되어 있다. 앞면에 “현령 윤공수 청덕선정비(縣令 尹公燧 淸德善政碑)”, 뒷면에 “구비건어만력갑인년 구절상 고숭정기원후삼기사 개수(舊碑建於萬曆甲寅年 久折傷 故崇禎紀元後三己巳 改竪)”라는 연기가 있다. 옛 비를 1614년(갑인)에 세웠는데 오래되어 훼손되자 숭정 기원 뒤 세 번째 기사년인 1749년(영조 25)에 다시 세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총 높이 158㎝, 비신 높이 125㎝, 너비 58㎝, 두께 22㎝이다.

22. 현령 한여직 청덕 선정비

1613년 9월부터 12월까지 현령으로 재직한 한여직(韓汝溭) 현령의 청덕 선정비이다. 시멘트 기단 위에 호패형 몸을 세웠다. 앞면에 “현령 한공여직청덕□□□(縣令 韓公汝溭淸德□□□)”라 내려쓰기 음각으로 새겼다. 총 높이 120㎝, 비신 높이 114㎝, 너비 55㎝, 두께 19㎝이다.

23. 군수 이범구 선정비

이범구(李範九) 군수의 선정비로 시멘트 좌대 위에 호패형의 몸을 세웠다. 앞면에 “군수 이후범구 선정비(郡守 李侯範九 善政碑)”, 좌우로 “정직청숙 화완민근 풍어인구 송지석면(正直淸肅 和緩敏勤 豊於人口 頌之石面)[바르고 곧고 청백하고 엄숙하였으며 화평하고 넉넉하며 민첩하고 근면하였네. 사람들의 입에 칭송이 넘쳐나니 그 칭송을 빗돌에 새겨 기리라.]”이라는 4언 4구의 송문을 내려쓰기 음각으로 새겼다. 그리고 아랫부분 양쪽으로 “도장(道莊)”, “□인사월(□寅四月)”, 뒷면에는 “무오구월 일 이수 임준□ 임병□(戊午九月 日 移竪 林準□ 林炳□)’이 새겨져 있다. 총 높이 114㎝, 비신 높이 105㎝, 너비 54㎝, 두께 15㎝이다.

24. 돈령부 도정 박규병 의장비

박규병(朴揆秉)의 의장비로 자연석을 다듬은 좌대 위에 홈을 파서 몸을 세웠다. 비의 머리는 한옥 지붕형이다. 앞면에 “돈령부도정 박규병 의장비(敦寧府都政 朴揆秉 義庄碑)”라 내려쓰기 음각으로 새겼다. 뒷면에는 11행의 음기가 있고 끝에 “기미사월사일 밀성 박준기 찬 하동 정순진 서(己未四月四日 密城 朴準基 撰 河東 鄭淳珎 書)”라는 연기와 찬자와 서자를 쓰고 있다. 기미년 4월 4일에 박준기가 글을 짓고 정순진이 글씨를 써서 세웠다.

25. 군수 김병도 숭유 흥학비

김병도(金秉璹) 군수의 숭유 흥학비이다. 장방형 자연석을 다듬어 좌대로 하고 위에 홈을 파서 호패형 몸을 세웠다. 앞면에 “군수 김후병숙 숭유흥학비(郡守 金侯秉璹 崇儒興學碑)”라 내려쓰기 음각으로 새겼다. 뒷면에 “임술사월 일 원능주(壬戌四月 日 元綾州)”라 연기가 새겨져 있다. 1922년 4월에 원능주 관련 지역에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120㎝, 비신 높이 110㎝, 너비 45㎝, 두께 17㎝이다.

26. 군수 박용훈 영세 불망비

1905년 9월부터 1907년 1월까지 재임한 능주 군수 박용훈(朴龍勳)의 영세 불망비이다. 화강석 신재로 만든 좌대 위에 몸을 세우고 머리에는 화문을 조식하였다. 앞면에는 “행군수 박후용훈 영세불망비(行郡守 朴侯龍勳 永世不忘碑)”, 좌우로 “자혜궁곤 □□성사 팔면□□ 만구풍비(子惠窮困 □□聖師 八面□□ 萬口豊碑)”라는 송문이 있다. 측면에 “丙午十月 日”의 연기가 있다. 재임 기간인 1906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총 높이 100㎝, 비신 높이 74㎝, 너비 42㎝, 두께 16㎝이다.

27. 군수 손인용 영세 불망비

손인용(孫麟鏞) 군수의 영세 불망비이다. 화강석 장방형 좌대 위에 오석으로 몸을 세우고 한옥 지붕형의 머리를 갖춘 현대 비이다. 앞면에 “군수 손후인용 영세불망비(郡守 孫侯麟鏞 永世不忘碑)”, 좌우로 “처관여가 보민약자 덕중어산 정청이수(處官如家 保民若子 德重於山 政淸而水)”라 새겼다. 뒷면에 7행의 음기가 있고 끝에는 “세병오팔월 일 안동 권령희 근찬 능주중학교근수(歲丙午八月 日 安東 權寧熹 謹撰 綾州中學校謹竪)”라는 연기[1966년]와 비문의 찬자를 적었다. 비문에 따르면 1978년에 향교 명륜당 앞으로 공적비를 옮겼다고 한다. 총 높이 180㎝, 비신 높이 115㎝, 너비 40㎝, 두께 16㎝이다.

28. 박준규 실적비

신암 박준규(朴準揆)의 실적비이다. 화강석 좌대에 몸을 세우고 한옥 지붕형의 머리를 갖췄다. 앞면에 “신암 밀양 박공준규 실적비(新菴 密陽 朴公準揆 實蹟碑)”, 뒷면에 10행의 음기, 옆면에 장흥 고광선의 추기 “단기사이오이년 기미(檀紀四二五二年 己未)[1979]”가 있다. 비석이 오래돼 마멸되어 박정래, 박현연, 박기호와 원천리 주민이 힘을 합하여 75년 후 계유[1933] 4월에 고쳐서 다시 세웠음[改碑竪]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원래의 비는 1859년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29. 우국지사 조준기 기적비

인봉 조준기(曺俊奇)[1898~1929. 8. 8.]의 항일 독립운동 기적비이다. 화강석 좌대에 2단의 받침을 만들고 몸을 세웠다. 좌대의 안상에 태극기를 새기고 비의 머리에는 무궁화를 장식하였다. 앞면에 “우국지사 인봉 조준기선생 기적비(憂國志士 仁峯 曺俊奇先生 紀績碑)”라 새겼다. 음기는 옆면 5행, 뒷면 14행으로 조용만이 짓고 비제 글씨는 김상필, 비문 글씨는 고영완이 써서 우국지사 인봉 조준기 선생 실적비 건립 위원회[위원장 양회영]에서 1986년 5월에 세웠다. 비문에 따르면 조준기는 능주에서 출생하여 일본강점기에 능주 청년회 조직, 육영의숙(育英義塾) 설립, 동아 일보 능주 지국을 개설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다가 1925년 일경에 체포되어 4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총 높이 208㎝, 비신 높이 178㎝, 너비 63㎝, 두께 32㎝이다.

30. 박규병 혜휼비

신암 박규병(朴揆秉)의 혜휼비이다. 장방형의 화강석 조대 위에 비의 몸을 세우고 한옥 지붕형의 머리를 갖추었다. 앞면에 “신암 박공규병 혜휼비(新菴 朴公揆秉 惠恤碑)”, 뒷면에 “구비명왈 일리전소 어시랑민 구조불석 입비송덕(舊碑銘曰 一里全燒 御侍郞民 救助不惜 立碑頌德)”라는 옛 비의 명문을 새겼다.

31. 소사 상옥 보시 불망비

진사 치재 김덕희의 딸인 소사 상옥(尙玉)이 주민을 구휼한 공적을 기려 세운 혜휼비이다. 장방형 화강석 2단 좌대 위에 홈을 파 몸을 세웠다. 비의 머리는 한옥 지붕형이다. 앞면 가운데에 “김진사 치재 덕희여 상옥 보시불망비(金進士 致齋 德喜女 尙玉 普施不忘碑)”, 좌우로 “십면천금 궐시유균 혜휼만호 서기사인(十面千金 厥施維均 惠恤萬戶 庶幾斯人)”의 송문이 있다. 옆면과 뒷면에는 음기[능주 향교 전교 박기호 찬, 5대손 김행곤 서]가 있다. 2004년 7월에 세웠다.

비문에 따르면 소사 상옥은 철종 갑인년[1854년(철종 5)]에 능주 일대에 흉년이 심하자 10개 면의 세금을 자부담하여 납부해 주었다고 한다. 이 공을 기려 1857년(철종 8)[咸豊七年丁巳] 10월에 비를 세웠고 2004년에 다시 세웠다. 명륜교 건너편 산기슭에도 상옥 관련 공적비가 있다. 총 높이 150㎝, 비신 높이 125㎝, 너비 50㎝, 두께 13㎝이다.

32. 주찬형 창선 기공비

참봉을 지낸 주찬형(朱燦馨)의 창선 기공비이다. 장방형 좌대 위에 2단의 받침을 두고 가운데 홈을 파서 몸을 세웠다. 비의 머리는 한옥 지붕형이다. 앞면에 “전참봉 주찬형 창선기공비(前參奉 朱燦馨 彰善紀功碑)”라 새기고, 뒷면에 10행의 음기가 있는데 “경오 중하 기망 가선대부 전향산수 파징 윤녕구찬(庚午 中夏 旣望 嘉善大夫 前香山守 波澄 尹寗求撰)[윤영구가 지어 경오년에 세웠다]”이라고 쓰여 있다. 비문에 따르면 주찬형은 향교 장의로서 성금을 내어 향교를 손질하였다. 총 높이 190㎝, 비신 높이 140㎝, 너비 52㎝, 두께 23㎝이다.

33. 주기준 선생 순국 영모비

면장을 지낸 근원 주기준(朱基俊)6·25 전쟁 당시 순국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순국 영모비이다. 장방형 화강석 좌대 위에 몸을 세우고 한옥 지붕형 머리를 올렸다. 앞면에 “전면장 근포 주기준선생 순국영모비(前面長 槿圃 朱基俊先生 殉國永慕碑)”, 뒷면에 10행의 국한 혼용체 음기가 있다. 1983년 3월에 능주 면민 일동으로 세웠다. 총 높이 240㎝, 비신 높이 160㎝, 너비 54㎝, 두께 23㎝이다.

34. 향교 외삼문 향 좌측 6기의 공적비

능주 향교 보수 찬조금 방명비[호패형], 능주 향교 중수비[호패형, 을묘(1975), 이병근 찬], 아석 문형태 장군 기적비(雅石 文亨泰將軍 紀績碑)[호패형, 을묘(1975), 이병근(李炳根) 찬, 이병현(李炳玹) 서], 군수 문병우 공적비(郡守 文炳宇 功績碑)[지붕형 머리, 기미(1979), 전교 이병근 지], 전교 이병근 공적비[호패형, 기미(1979), 유도 회장 염원섭(廉元燮) 지음, 건립 추진 위원회 세움], 성재 이공태신 모성비(誠齋 李公泰信 慕聖碑)[지붕형 머리, 경진(2000), 제주 양규승(梁圭承) 찬, 청도(淸道) 김정희(金正熙) 서] 등이다.

35. 향교 입구 명륜교 건너기 전 산기슭의 2기

고 거사 박공 성주 시혜추사비(故 居士 朴公性柱 施惠追思碑)[총 높이 170㎝ 비신 높이 124㎝, 지붕형 머리, 계해(1923) 4월 8일 세움], 주내 김성 상옥 시재불망비(州內 金姓 尙玉 施財不忘碑)[十面千金 厥施維均 有臺 淸 庶幾斯人, 호패형, 병인 3월] 등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부터 개항기의 능성 현령, 능주 목사, 능주 군수 등 지방관의 행적과 화순군 능주 지역 향토학 현장을 알 수 있는 유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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