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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낙안 터에서 유래한 마을 지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A010101
한자 平沙落雁-由來-地名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경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선/ 후기 1600년 경 - 금사 하윤구 선생이 금사정을 축조하였다. 금사정은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의 관직에까지 오른 하윤구가 세운 정자로 마을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근대/일제 1897년 - 1897년 큰 홍수로 지금의 마을 앞 물길로 바뀌었다.
현대/현대 2011년 12월 8일 - 2011년 12월 8일 야사 마을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3호로 선정되었다.
마을지 이서천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보와들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진뱀이들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금사정 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우데미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야사제1교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아리데미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뽕나무단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뽕나무가로수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옛 이서천 물길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은 빼어난 자연경관의 평사낙안 터, 평사]

야사 마을의 옛 지명은 평사이다. 특히 빼어난 절경으로 평사낙안 터라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어느 도사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무명 도승이 야사 마을을 지나다 보니 ‘좋다, 좋다 평사낙안[平沙落雁, 모래 위에 내려앉는 기러기]이로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 모양이다. 평사낙안이란, 중국 동정호 남쪽의 소수와 상수가 합류하는 곳에 펼쳐지는 8가지 경승 중의 하나이다. 물길과 모래, 그리고 그 위에 내려앉은 기러기가 어우러진 절경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이인로도 연작시인 ‘공적팔경도’에서 평사낙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물길 아득하고 하늘 드높은데 해는 기울고,

지는 해를 따라 기러기는 모래톱에 내려앉네.

줄줄이 점을 찍어 짙푸른 가을 하늘을 깨뜨리고,

누런 갈대밭에 내려앉아 흰 꽃을 흔드네.“

야사 마을은 깊은 산과 맑은 물 그리고 들녘이 어우러진 절경의 산골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1,000m가 넘는 무등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방아재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마을 뒤까지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마을 앞 이서천 너머가 별산 등성이고, 동쪽으로는 멀리 적벽산이 보인다. 이런 첩첩 산중이지만 맑은 하천이 넓은 들을 이룬다. 그렇기에 평사라는 지명을 얻은 것이다.

[비단과 들녘을 품은 마을 지명, 금사]

야사 마을은 자연에서 비롯된 평사 외에, 금사(錦沙) 마을로도 불렸다고 한다. 비단 금에 모래 사이니, 비단은 양잠이요, 모래는 이서천 물과 함께 무등산에서부터 실려 온 모래를 뜻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양잠과 농사는 삶 자체라 할 만큼 중요한 산업이다. 따라서 야사 마을에서도 일찍이 양잠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금사는 야사 마을의 주요 성씨인 진주 하씨와도 관련이 있다. 1600년경에 하씨 집안의 금사 하윤구(河潤九) 선생이 입향하게 된다. 그로부터 야사 마을은 양반마을로서, 실학마을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하씨는 진주에서부터 정읍, 동복, 영신 마을을 거쳐 금사 선생대에 야사로 입향한다.

“처음에는 진주에서 정읍으로 와요. 다시 동복으로 오시는데 그때가 나로 21대인가 그럴 거예요. 그 다음에 영신에 사시다가 이리로 와요. 금사 선생은 나로부터 12대 조부지요.” (하상백)

금사 선생은 과거에 급제하여(1613년) 전적(典籍, 성균관의 정육품)의 관직에까지 오른 분으로, 금사정이라는 정자도 세웠다고 한다.

[이서천이 무등산 모래로 빚은 마을, 사천·사촌]

금사 마을은 그 이후 사촌(沙村),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서천무등산에서부터 점점 수량을 더해 야사 마을에 많은 모래를 가져다주었기에 얻은 지명일 것이다. 옛 이서천 물길은 보와들 쪽이었는데, 정유년(1897) 홍수로 지금같이 물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물길이 저기 당산나무 욱으로(위로) 해서 안으로 돌아가지고 냇가 저쪽으로 돌았답디다. 집 있는데 요리가 소나무, 참나무 밭이 허벌나게 왕성하게 되었답디다. 그런데 큰 비가 와 가지고 물이 이렇게 바꿔져 버렸답디다. 그 분은 돌아가셨는데, 그 분도 어른들한테 듣는 말씀이라고 합디다.”(이순준)

그 후에도 홍수 때는 아리데미 안쪽의 집 앞까지 물길이 넘쳤다고 한다. 이렇게 물길까지 바꾸어가며 이서천이 많은 모래를 실어다 주니 사촌, 사천이란 지명을 얻은 것이리라.

[비옥한 들녘 마을, 야사]

사촌 혹은 사천이라 불렸던 마을지명은 현재는 들모실[들에 있는 마을]을 한자화하여 야사(野沙) 마을이라 한다. 무등산에서 내려 온 모래는 비옥한 토지로 다져지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한 모래 마을보다는 들녘 마을이라는 지명이 어울린다. 야사 마을이서천을 사이에 두고 가옥이 모여 있는 아리데미[아랫마을]와 이서천 건너 우데미[윗마을]로 이루어진다. 우데미에는 퇴적층인 보와들이 넓게 펼쳐져 논농사가 한창이다. 야사제1교를 건너면 아리데미이다. 동편 끝자락에는 진뱀이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예전에는 여기서도 논농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진뱀이들의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기고 마을 가까운 들녁에는 뽕나무 단지와 뽕나무 가로수가 이색적이다. 그 많은 뽕나무는 야사 마을에서 양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하게 한다. 들녘 마을은 농사와 양잠으로 여전히 풍요롭다. 또한 여전히 빼어난 절경의 평사낙안 터이다.

[정보제공]

  • •  김경례(여, 1940년생,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주민)
  • •  이순준(남, 1955년생,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전 이장)
  • •  하상백(남, 1946년생, 규남 하백원 선생 후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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