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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 마을의 옛길을 추억하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A010301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교육/교육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경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야사 마을을 묘치로 연결하는 23번 군도의 확장 및 포장 1994년 - 산골 오지 야사 마을은 1994년 23번 군도의 확장 및 포장으로 담양-광주, 고흥-보성 방면과의 연결이 편리해졌다.
전라남도로부터 화순군 최초의 행복마을로 지정 2009년 - 야사 마을은 2009년에 화순군에서는 처음으로 행복마을로 지정된다. 전라남도는 2007년부터, 농촌 인구 유입 증대, 마을공동체 복원, 농 외 소득 증대, 일자리 창출, 한옥의 국내외 홍보 등을 목적으로 ‘행복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3호로 지정 2011년 12월 8일 - 야사 마을은 2011년 12월 8일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연합’으로부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3호로 지정되었다.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지 묘치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 마을 옛길은 호남 실학의 교류지가 되다]

야사 마을의 길은 사람과 문화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며, 마을의 위상을 변화시켜 왔다. 현재 야사 마을은 교통이 불편한 산골 오지이다. 그러나 과거 차가 없던 도보시절, 전라남도 남쪽 지역과 북쪽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순천·보성 지역에서 광주나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지름길인 야사 마을을 거쳐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규남 할아버지는 신경준, 홍대용 그런 분들에 관한 정보 내통을 통해 실학을 했거든요. 특히 보성의 오봉 안수록 선생[조선 헌종 당시 문인으로 영희전참봉, 첨지중추부사 지냄]하고는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쭉 교류를 하셨어요. 보성을 갈려면 걸어서 하루 걸려요.” (하상백)

이렇게 야사 마을은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규남 하백원 선생의 과학적 사고와 실용적인 기구 제작, 저작 활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마을이 지금 보면 엄청 오지거든요. 그래도 옛날에는 서울이나 광주를 가기 위한 제일 가까운 지름길이었어요. 교통의 요지라고 봐야겠지요.”(하상백)

그런데도 교류가 가능했던 것은 교통이 빈번했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야사 마을의 옛길은 번창하던 사람과 문화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통의 요지에서 산골 오지 청정지역으로]

야사 마을은 포장된 지방도로가 다른 지역과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 안쪽에도 새로운 길이 생기고, 길도 넓혔다. 없어진 길은 없다. 심지어 23번 군도는 마을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없어진 길은 없제. 새로 사방 데가 논 앞에도 새로 났제. 거긴 논길인데 지금은 찻길이 되고 차가 다 댕기잖아. 마을 가운데 큰 길도 새로 생기고’. 좁은 옛길은 새마을 사업으로 길을 넓혔어요. 지금은 교통이 좋제. 길이 다 뚫리고. 차도 많이 있더라고. 화순서도 광주서도 1시간에 1대꼴로 있습디다.”(최생학)

길이 많지 않던 도보 시절, 야사 마을은 교통의 요지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시원한 자동차 길이 사방으로 뚫리자 야사 마을은 오지마을이 되었다. 자동차 길이 좋아지지만, 산골 야사 마을은 새로운 길이 비켜갔다.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뒤지니 오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까지도 야사 마을 길은 모두 샛길이었다. 화순이나 광주 같은 중심지로 한 번 나가려면 큰 일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한, 두 대 다니는 차는 복잡하고, 그나마 놓치면 가족들이 반찬이 없어 식사를 굶어야 할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콩나물 시루 같은 차를 타거나 아니면 6㎞나 떨어진 묘치 고개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하씨 양반들만 다녔던 학교 앞 옛 길]

현재 화순 야사리 쌍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은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 동쪽 도석리에 있는 이서 장터로 가는 길목이었다. 지금은 하나의 나무처럼 붙어있는 모습이지만 과거에는 두 나무의 사이가 사람들이 도보로 다니는 길이었던 것이다. 1927년에 이서 공립 보통학교가 들어서면서 화순 야사리 쌍 느티나무는 지금의 폐교된 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남게 되었다.

넓게 포장이 된 학교 앞의 길[23번 군도]은 마을의 가장 중심 도로로 과거에는 하씨 양반들이나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마을의 청년 인구가 많고 학생들이 많았던 시절 학교 앞 길은 아무나 함부로 다니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는 자자일촌 하가들만 살았어요. 양반마을이라고 해갖고 솔찬히 깔끄러워. 하가 아니고는 여기를 못 지나가고 갱변 앞으로 해서 지나가. 술먹고 어영부영하면서 그 길을 지나면 맞아죽었어요.”(하장호)

예나 지금이나 화순읍에서 야사 마을로 들어오는 큰 길은 야사제1교를 통해 들어오는 길이다. 야사제1교가 놓여져 있지 않던 시절에는 뒷구렁보, 물레방아보, 은행나무노지, 갱변보, 싸리재노지 등 이름만으로 정겨운 작은 징검다리길과 보를 통해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마을을 관통하던 두 줄기의 옛 이서천 물길은 영화로웠던 마을의 흔적을 뒤로 한채 조그만 실개천으로만 남았다.

이서천의 위쪽 물길은 학교 앞의 도로를 넓히게 되면서 복개되었다. 동네에서는 가장 큰 빨래터가 있던 곳으로 아낙들의 빨래하며 담소를 나누던 곳이며 어린 아이들의 물장난을 치며 놀았을 소중한 놀이터였다. 또 하나의 옛 이서천 줄기인 아래쪽 물길은 마을 안쪽의 조그만 실개천으로 남아 희미한 흔적을 지닌 채 아직까지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정보제공]

  • •  나금연(여, 1936년생,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주민)
  • •  최생학(여, 1932년생,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주민)
  • •  하상백(남, 1946년생, 규남 하백원 선생 후손)
  • •  하장호(남, 1937년생,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참고문헌]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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