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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 마을 그림 지도를 그린 하백원 선생의 후손 하장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A030301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근대 1937년 - 하장호 출생
근대 1964년 - 하장호 혼인
현대 1999년 - 하장호씨가 1945년 야사리마을 지도를 그림으로 완성하다
현대 2012년 - 하장호씨가 지금은 전하지 않는 하백원 선생의 발명품인 자명종을 그림으로 그려 완성하다.
마을지 하장호 집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대신파크207호
마을지 일제시대 학교 내 잠실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마을
마을지 일제시대 학교실습답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마을

[하백원 선생의 자명종을 그림으로 그리다]

“요것이 돌아요, 이 동자가. 돌면서 땅땅 쳐서 시간을 알려줘요. 몸체는 전부 놋쇠로 되어 있어. 이것이 테입이 있어. 테입을 감아주면 이 동자가 돌면서 종을 때려서 시간을 알려줘.”

가로 20㎝, 세로 25㎝ 정도의 크기였다는 「자명종 그림」을 보면서 야사 마을 출신 하장호 씨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자명종 그림」은 하장호 씨가 그렸는데, 본래 자명종은 야사 마을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규남 하백원 선생이 18세기 무렵에 발명한 시계다. 지금은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있는데, 2004년에 규남 선생 기념 학술대회를 할 때 김경수 박사의 부탁으로 하장호 씨가 그림으로 그려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며칠 연구해서 그렸다니까. 생각도 안했는디. 딱 정확하니 안맞으면 안돼. 근디 상상화로 그릴라니까… 정확하게 그릴란디 센치가 안맞으면 안되니까, 나도 며칠을 연구해서 그렸어.”

몸체와 부품들이 모두 놋쇠로 만들어졌다는 자명종은 일제 강점기에는 교무실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후에 6·25 전쟁 난리 속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기억만으로 자명종을 그림으로 그려낸 하장호 씨. 그는 이 자명종 말고도 야사 마을 장수 마을 건강 관리실에 걸려 있는 「1945년 야사 마을 지도」를 1999년에 제작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45년 야사 마을의 풍경과 기억]

야사 마을 그림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하장호 씨의 손가락이 화순 이서 우체국 뒷산 자락에 있었던 옛 신사터에 이르자, 갑자가 목소리가 커진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겨울에 날이 추운께, 그때는 가방이 아니라 책보에 책을 둘둘 말아서 학교 교실 책상 속에 딱 넣어놔. 그러고는 집으로 와부러. 집이 와서 딱 이불쓰고 드러누워있다가, 그때는 ‘강강강 가네가 나리마시다’라고 종을 쳐. 치면 대번에 뛰어 나와. 뛰어나오면 운동장에서 조회를 혀. 조회가 끝나면 요기서 요 길로 가서 요리 신사당 참배를 혀. 무. 조. 건. 아침마다. 매일. 토요일 일요일날은 안되고. 신사당에 천황을 모셔놨는디. 신사당 고놈은 해방이 된께 냅다 뿌셔서 둥글려서 학교 마당에서 태워부렀어.”

하장호 씨는 이런 신사 참배를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도에 야사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귀찮은 신사참배는 하지 않게 되었지만, 또 다시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중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복이 되면서 18세에 겨우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스무살이 되어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역시 졸업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정도도 아주 높은 학력이었기에 제대 후에 강릉에서 교편도 잡아보고 했다. 교편 이야기에 젊은 시절이 생각난 듯, 하장호 씨가 한참을 당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지도에 있는 ‘잠실’(일제시대 이서공립국민학교 운동장 옆에 위치함)을 가리키면서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다.

“옛날에 우리 마을이 베를 많이 짰거든. 근디 요것이 잠실이라고 우리 초등학교 댕길 때 왜정놈들이 누에를 키웠다고. 학교 안에서 누에를 키웠는디. 뽕밭이 어디가 있었냐면, 학교 실습답이 어디가 있냐. (‘학교실습답’이라고 적혀진 곳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키웠어. 뽕잎을. 학교 실습답을 우리가 농사를 지었어. 째깐한 것들이. 학교 뒤, 요기 뒤에 변소, 여기서 똥물을 퍼다가 뽕밭에 주었다고.”

[마을 지도로 규남 할아버지의 실학 정신을 잇다]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한참을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하장호 씨에게 마을 지도를 그리게 된 이유를 물어보았다.

“내가 밥만 묵으면 [학교 당산나무 그림을 가리키면서] 요리 가서 놀아. 요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할 적에, 내가 그래도 거기서 나고 자랐는디. 젊은 층에서 마을을 전부 다 몰라요. 나이 먹은 사람도 전부다 죽어불고. ‘뒷동산’이니 ‘솔대봉’이니 나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일이 물었지요, 어른들한테 물어서 그대로 적은 거요. 마을 사람들이 다 잊어불고 있응께. 내가 인자, 나라도 요런 것을 맨들아 놓고 죽으면 우리 후손들이 45년도에 왜정 때 우리 마을이 요렇게 되아갖고 있었구나... 하고 알 것 아니요?”

잊혀져 가는 마을에 대한 모습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 싶어 그림 지도를 그리게 되었다는 하장호 씨는, 1945년도 야사 마을의 모습이 담긴 지도를 모두 석장을 그렸다. 그 중 한 장은 큰집 조카가 보관하고 다른 한 장은 그림을 그렸을 당시 회관으로 사용되었던 지금의 장수 마을 건강 관리실 벽에 붙여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은 좀 더 크게 그려 상하지 않게 판넬 작업을 해서 하장호 씨의 안방 벽에 붙여놓았다.

하장호 씨가 보관하고 있는 마을 지도는 길과 냇물, 집, 논과 밭, 산 등을 모두 구별해서 각각의 색으로 칠해놓았다. 그래서인지 지도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전문 화가가 그린 듯 착각마저 든다. 이런 솜씨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하자, 하장호 씨는 어려서부터 그림솜씨가 좀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순신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 단군왕검세종대왕 등의 초상화는 모두 자신이 그린 것을 교실 벽에 붙여놓았었다고 은근한 자랑도 잊지 않으신다.

하장호 씨는 교직 생활뿐만 아니라, 그 뒤로도 여러 직업을 거쳐 화순군 농협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지금은 부인과 함께 광주에서 살고 있지만, 주말이면 야사리에 들어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혼자 계시는 형수님도 들여다보고는 하신다.

“이것을 그린 또 하나의 목적은 이것을 큰방에 걸어놓고 누워서도 보고. 내가 어렸을 때 여기를 나와갖고 놀러댕긴 길이. 학교 당산나무에서 놀고. 어렸을 적에. 그것을 상상해. 그래 요리 나와갖고 여기 웃방천이란 데가 있어. 거기서 목욕하고. 그것이 좋아서 그렸어.”

마을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렸다는 야사리 전도. 규남 하백원 선생은 1800년대에 지금의 세계 지도인 「만국 전도」를 남겼고, 그로부터 200년 뒤에 규남 선생의 후손 하장호 씨는 야사 마을 그림 지도를 완성했다. 비록 하장호 씨가 마을 지도를 그릴 당시에 규남 할아버지에 대해 기억하고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하였지만, 규남 선생의 실학 정신이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그의 후손에게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보제공]

  • •  하장호(남, 1937년생,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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