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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까지 들썩거렸던 탄광의 월급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B020302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복암리 구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라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화순탄광산업의 전성기 1970-80년대 - 탄광산업의 전성기로 탄광생산량과 직원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다. 이 시기 화순 광업소 직원들의 월급도 다른 직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
마을지 구암삼거리 상점들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복암리
마을지 천운 마을 도로 상점들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월급도 있고, 보너스도 있었어!]

‘탄광’하면 연상되는 것이 검은 흙, 석탄, 탄가루 등 주로 검은 색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탄광 마을과 사람들도 무채색 빛 애환이 담긴 삶의 모습이 연상된다. 하지만 화순 광업소와 탄광 마을 사람들은 한때 산업 전사로서 지역 경제를 이끌었고, 버거운 환경에서도 활력 있는 삶을 살았다. 특히 석탄 산업 경기가 호시절이던 1970~80년대에는 화순 광업소 월급날이면 마을뿐만 아니라 화순군까지 생기가 돌았다고 한다.

고된 노동의 대가로 받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당시 화순 광업소 노동자들의 월급은 당시로선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의 정확한 월급 액수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한 달 월급이 공무원의 다섯 달 치, 군수 월급의 두 배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 광업소를 다녔던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당시 다른 직업과 비교해서 광업소 직원들의 월급 수준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학생 시절에 화순 광업소 남갱장 하시던 친구 삼촌 집에 갔다가 ‘반드시 석탄 공사에 들어가야겠구나’하고 결심을 했지. 친구 따라 갔더니 그 어렵던 시절에 소갈비를 불에 구워서 주시더라고. 우리 아버지께서 교장 선생님을 하셨는데도 나는 그런 건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월급이 얼마냐 여쭤봤죠. 당시 중학교 교장이시던 우리 아버지 월급이 6만 8000원이었는데, 갱장 월급이 무려 14만 5000원이었어.” (『석공』인터뷰 자료)

또한 광업소 직원들에게는 월급만 지급되는 것이 아니었다. 월급 이외의 보너스가 지급되어 고된 노역을 잠시 잊게 해주었고, 광업소 직원들의 가정 경제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오는 게 월급 있고, 월급 이외에 또 3개월에 한 번씩인가 보너스가 나와, 보너스가 나왔어. 그리고 또 여름에는 여름 휴가비 있고, 명절 보너스 나오고, 또 김장보너스가 있다. 지금은 그런 거 다 없어졌지만 그때는 있었어, 그때 봉투에다 갖고 오지. … 우리 아저씨도 술 많이 먹었어, 무지하게 잡쉈어. 지금은 통장으로 들어오니까 그런 거 뭐 없지.”(조효순)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하는 광부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았던 임금과 몇 차례 지급되었던 보너스는 값진 노동의 결실이자 생활의 활력이었을 것이다.

[월급날이면 풀렸던 현금]

화순 광업소의 월급은 광업소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석공』사보에 따르면 86년 한해 광업소에서 발생한 인건비는 월 평균 57억이었으며, 이중 화순은 5억 5천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월 인건비 5억 5천만 원이 화순의 작은 지역에 풀렸다는 것은 탄광 노동자들의 임금이 지역 경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하게 한다. 실제 화순 광업소 월급날이면 화순 광업소 주변인 구암 삼거리의 식당과 술집부터 천운 마을 막걸리 집과 대포 집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일이 힘든께 술 많이 먹어. 우리끼리 작업 끝내고 ‘작업타협’하자고 하거든. 그게 얼른 말하면 회식이여, 회식. 그럼 슈퍼 가서 기다리는 와중에 소주 한 병 먹고 나서 회실 갈 정도로 술 많이 먹었어. 그래야 버티지.”(최병철)

1970~80년대 탄광 산업의 호시절과 함께 탄광 마을에 즐비했던 상점들과 술집은 화순 광업소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만큼 화순 광업소 주변 상권(商圈)의 경기가 좋았고 상점들로 즐비했다. 그로 인해 한때는 천운 마을이 인근의 최대 마을로 자리 잡게 된 이유이다.

[화순 광업소 덕을 많이 봤지]

상대적으로 높았던 화순 광업소 노동자들의 월급과 소비의 영향력은 화순뿐만 아니라 광주까지 들썩이게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광업소 직원들은 월급날이면 화순으로 나가거나 더 멀리는 광주까지도 술을 마시러 나가곤 했다. 그리고 씀씀이가 좋았던 광업소 직원들은 어디를 가든 환영받았다. 산업 전사로서 광부들은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활력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화순 광업소 다닌다고 하면 술을 줬어. 화순 시내는 물론이고, 술 먹으러 광주로도 많이 나가지. 광주 지원동, 학동, 남광주까지는 화순 광업소 덕을 많이 봤지. 광업소 다니는 사람들이 씀씀이가 좋아서 인기가 좋았어. 근께 옛날에는 너이 모이면 돼지 한 마리 잡았어. 그래갖고 다리 하나씩 가져가고. 그렇게 광업소 다닌 사람들이 씀씀이가 좋았다니까.”(최병철)

오늘날까지 화순 광업소가 화순군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군 단위 제조업체로 600명의 직원을 채용하고 있는 업체는 흔하지 않다. 또한 화순 광업소 연간 예산이 500억 정도 되는데, 이중에 인건비가 200억 정도 된다고 한다. 예전처럼 월급날이면 화순 광업소 주변이 시끌벅적하지는 않지만 화순 광업소는 여전히 화순 지역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정보제공]

  • •  김기범(남, 1964년생, 대한 석탄 공사 노동조합 화순 지부 기획과장)
  • •  조효순(여, 1953년생,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부녀회장)
  • •  최병철(남, 1953년생,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이장, 화순 광업소 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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