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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탄 작업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B030201
분야 생활·민속/생활,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복암리 구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김정록 할머니 출생 1943년 - 화순의 탄광 마을로 시집온 김정록 할머니는 전북 부안에서 1943년에 출생하였다.
김정록씨, 탄광 마을로 이사하다. 1963년 - 1963년에 김정록 씨가 탄광 마을로 이사하다.
김정록씨가 복암역전에서 막걸리 장사를 하다. 1980년 - 1980년에 김정록씨가 복암역전에서 막걸리 장사를 하였다.
마을지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충의로 1064
마을지 복암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천덕리 1
마을지 십촌마을 터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복암리

[여자들은 청법으로 일했지요]

천운 마을 회관 안에 할머니들 대여섯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화투를 치고 있다. 겨울이면 어느 시골 마을 회관에 가더라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곳 탄광촌인 천운 마을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 속에 정정남 씨도 한 자리 하고 앉아 있다. 정정남 씨는 연장자인 할머니들이 화투치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하는 정도지 화투판에 끼지는 않는다고 한다.

정정남 씨는 젊은 시절 탄광에서 일을 했던 경험이 있다. 지금이야 광업소 안에 있는 세탁소와 식당 외에는 여자들이 할 일이 없지만, 정정남 씨의 30대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는 여자들도 탄광 안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선탄작업과 돌을 버리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는데, 한 작업장에 일곱 명씩 일을 했다고 한다. 선탄 작업과 함께 화차에 석탄을 삽으로 떠서 붓는 작업은 주로 남자들이 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남자가 부족하면 여자들도 탄을 떠서 붓는 작업을 했다. 당시 정정남 씨와 남편도 선탄 작업과 탄을 떠서 붓는 작업을 했는데, 이렇게 임시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을 ‘청법’이라고 불렀다.

선탄 작업은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두 차례로 나눠서 하는데, 광업소에서 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거나 도시락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골라낸 돌을 버리는 작업까지 하고 나면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갈 수 있었으니, 잠도 부족하고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을 해서 번 돈이 한 달이면 겨우 6천 원, 7천 원이었다. 정정남 씨의 경우 남편도 같은 일을 했기에 광부로 일하는 집에 비하면 생활은 늘 빠듯했다고 한다.

“당시에 최고 많이 벌면 6천 원도 벌고. 한달에. 그때만 해도 광부들도 월급이 얼마 안돼. 6천 원도 벌고 7천 원도 벌고. 그래갖고 돈 백 원 갖고 시장에를 가면 야채 뭐 그런 것 팔고, 한달 먹을 놈 보리쌀 두 말. 보리쌀 딱 두말 팔고 쌀 닷되 팔고 나머지는 전부 외상으로 갖다 먹어. 돈이 없응께. 외상으로 갖다 먹으면 돈 봉급 나오면 그놈 싹 갖다 갚으러 다녀. 그러면 또 돈이 없어. 외상으로 갖다 놓고 돈 나오면 갚고.”

정정남 씨는 서른 살에 선탄 작업을 했지만 서른일곱 살에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작업이 점차 기계화가 되어서 더 이상 일손이 필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차타고 시집온 새색시]

정정남 씨는 1948년에 화순군 이양면에서 태어났다. 열아홉 살에 이곳 천운 마을에 사는 신랑과 결혼해서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벌써 올해[2013년]로 46년이 되었다. 남편은 당시에 서른두 살로, 정정남 씨와는 열세 살의 나이차가 났다.

“위험한께 광업소로 시집 안와. 위험한께 오겄소? 돈만 많다고 하지. 위험한께.”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위험한 작업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광부들에게 시집올 여자는 그다지 많이 않았기에, 당시 광업소 남자들 중에는 정정남 씨의 남편처럼 노총각이 꽤 많았다고 한다.

시집올 때는 화차를 타고 왔다. 화차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차를 말한다. 화차 끝에 사람들이 탈 수 있도록 객차 하나가 달려있는데, 그것을 타고 왔다는 말이다. 화차를 타고 시집올 때는 긴장해서인지 별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객차 안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움직이기도 힘이 들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탄광 마을 사람들은 외지로 나갈 때면 버스보다는 화차를 더 많이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사람을 짐짝 취급했던 화차에 대한 기억은 별로 유쾌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탄 덩어리 주워 가다가 불 때고 살았다]

화차를 타고 들어온 새색시 정정남 씨의 삶은 고단했다. 남편과 함께 선탄 작업도 하고 탄을 떠 붓는 작업도 했지만, 품일을 해서 사는 생활은 늘 궁핍했다. 당시에 대한 석탄 공사 화순 광업소 직원들에게는 연료로 사용하도록 매일 ‘연탄’ 몇 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정남 씨 남편은 광부가 아니었기에 그런 혜택도 받을 수 없어 늘 버려진 탄 덩어리를 주워 가져다 아궁이 불을 태우곤 했다. 그것도 없으면 광산에서 나오는 버려진 나무를 주워 가져다 불을 땠는데, 그것을 때면 늘 얼굴이 새까매지곤 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가끔은 후회도 한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일찍 다른 곳에 가서 살았으면 이보다는 덜 고생했을까 싶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곳이지만, 그래도 이곳 탄광 마을에서 일을 해서 4남매 모두 학교도 보내고 결혼도 시켰다. 지금도 넉넉지는 않아서 식당일과 같은 품일을 하러 다녀야 하지만, 탄광 마을을 제2의 고향이라고 여기는 정정남 씨는 천운 마을을 떠나서 살 생각은 없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정정남(여, 1948년생,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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