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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양팽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009
한자 朝鮮-代表的-文人畵家-梁彭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원복

[양팽손의 삶과 사회적 배경 : 기묘사화와 문인화가의 길]

호남의 대표적 문인화가로는 조선 후기의 윤두서(尹斗緖)[1668~1715]와 조선 말기의 허련(許鍊)[1808~1893]을 꼽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앞선 시기인 조선 전기의 화가로는 중종 때 문장과 서화로 명성을 얻은 양팽손(梁彭孫)[1488~1545]이 있다.

양팽손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출신으로 송흠(宋欽)[1459~1547]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로 급제해 공조 좌랑·형조 좌랑·사간원 정언·이조 정랑·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했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주치주의(主治主義)에 동참하여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양팽손은 생원시에 같이 등과(登科)한 조광조와 평생 뜻을 같이했던 지인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조광조양팽손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서화가로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은 30대 초반에 삭탈관직(削奪官職)되자 낙향해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거하며 근 20년에 걸쳐 학문과 서화에 전념한 데에 기인한다. 50세에 관직에 복귀되었으며, 죽기 1년 전 58세에 용담 현령에 제수되었다.

한자 문화권의 서화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조선에서도 서화를 즐긴 제왕과 종실을 비롯한 양반들로, 출사(出仕)[관직에 나간 선비]한 관료나 포의(布衣)[벼슬에 나가지 않는 선비]인 지식인 화가들이 있다. 이들은 문인화가로 지칭되는데 조선 초기 강희안(姜希顔)[1417~1464]으로 대변되는 진주 강씨나 조선 후기 윤두서로 대변되는 해남 윤씨 등이 특별히 서화로 이름을 얻은 문중들로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제주도 유배 시절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듯, 조선 중기 연안 김씨 김시(金禔)[1524~1593]와 청송 심씨 심사정(沈師正)[1707~1769]처럼 관직의 진출이 막힌 지식인 중에는 서화로 이름을 떨친 이들이 적지 않다.

또 한 부류는 양반 아닌 중인들로, 그림을 생업으로 삼은 직업 화가들이다. 이들은 예조 산하에서 회화를 관장하는 기관인 도화서에 속한 말단 공무원인 화원(畫員)들이다. 화원들은 궁중 행사를 담은 기록화나 왕궁을 화려하게 장엄하는 각종 장식화, 임금님 초상인 어진과 공신도상 및 세화(歲畫) 등을 담당한다. 그림의 수요층이며 시대의 안목을 지니고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는 것은 문인화가의 몫이나 이를 유행시켜 활짝 꽃피움은 직업 화가의 역할이다.

윤두서조영석(趙榮祏)[1686~1766] 등 풍속화의 시작은 문인화가이나 이를 만개시킴은 화원들인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김홍도(金弘道)[1745~1806]·김득신(金得臣)[1754~1822]·신윤복(申潤福)[1758?~1813] 등이 대표적 화원이니, 두 부류는 천을 짤 때의 날줄과 씨줄처럼 양자의 역할은 동가이며 상호 보완적이라 하겠다.

[대표작으로 지칭되던 「산수도」]

마치 양팽손의 대표작이나 기준작인 양 잘 알려진 그림으로는 일제 강점기인 1916년 4월 18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 총독이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한 「산수도」[유물 번호 본(本)2034]이다. 「산수도」는 1934년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 고적 도보(朝鮮古蹟圖譜)』 제14책에 「전 양팽손[학포]필 산수도」로 게재되어 일찍부터 알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은 그 이후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1972년 개최한 ‘한국 명화 근 5백 년 전’이나 ‘한국 미술 2천 년 전’을 비롯해 1976년 일본과 1979년 미국에서 개최한 ‘한국 미술 5천 년’ 등에서 전칭(傳稱)을 떼고 양팽손의 진품으로 소개되었다.

「산수화」의 화면 오른쪽 상단에 2수(首)의 제시(題詩)[그림에 쓴 시나 각종 글]에 이어 양팽손의 호인 ‘학포(學圃)’의 관서가 있어 이를 그린 화가로 간주했다. 그러나 간송 미술관 소장 윤두서의 「심산지록(深山芝鹿)」을 비롯해 김익주(金翊冑)[1684~1735]의 찬이 있는 「호렵도(胡獵圖)」 등에도 같은 관서(官署)[문서에 관인을 찍는 일]와 도장이 있음이 밝혀졌다. 작품 안에 시(詩)를 쓴 학포는 양팽손이 아닌 18세기 이후 다른 인물로 확인된다. 그러나 산수도는 16세기 전반 회화의 전형(典型)을 보이니 양팽손이 살았던 시대의 그림임은 분명하고, 시는 후대에 쓴 것으로 사료된다. 「산수도」는 조선 전기 그림이 일본에 끼친 영향 등 한·일 양국 회화 교류의 측면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아울러 일본에서 유사한 화풍을 보이는 「산수도」가 양팽손의 전칭작(傳稱作)[작가의 이름이 없지만 학자 등에 의해 그의 것으로 확인된 작품]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양팽손의 전칭작은 화면 좌측에 무게를 두어 우측은 수면으로 열린 공간으로 논리적인 전개를 펼치며, 짜임새 있는 구성과 필치에서 문인화가보다는 직업 화가의 그림으로 봄이 옳을 것 같다. 현존하는 16세기 전반의 그림들과 화면 구성과 구도 및 필치에서 공통점이 두루 감지된다. 화면 상단 여백에 하단에 참가한 인물들을 열거한 좌목(座目)이나 상단에 계회 명칭이 없으나 특히 계회도(契會圖)와 관련이 매우 크다. 근경 배 안을 비롯해 중경 언덕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시동과 조선 복색으로 의관(衣冠)을 제대로 갖춘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 점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아울러 두 편의 제시는 그림 내용을 그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같이 화면 내 제시가 있는 그림은 국립 중앙 박물관과 국립 광주 박물관에 각기 한 폭씩 소장되어 있다.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동기 7명이 1542년경 모임을 갖고 그 중 한 사람인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제시를 쓴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예안 김씨 문중에 전해 온 계회도 중 1542년경 제작한 「추관계회도(秋官契會圖)」와 1606년경 그린 「금오계회도(金吾契會圖)」 등이다.

1992년 화순 문화원에서 『학포 양팽손 문집』을 번역 출간하면서 양팽손의 전칭작인 「산수도」와, 1539년 일본의 승려 존해(尊海)가 일본으로 가져간 이츠쿠시마[嚴島] 대원사(大願寺) 소장 필자 미상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8첩 병풍을 일본 동경 국립 박물관 소장 양팽손 그림으로 게재하고 있는데 소장처도 화가도 정정을 요한다.

[양팽손의 그림 세계와 영향 : 산수와 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畫目)]

지금까지 양팽손의 유작으로 알려진 그림들은 산수·영모·묵죽·기명 등 10점 내외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아쉽게도 목판(木版)이거나, 격조에서 다소 뒤지는 전칭작들로 그의 화경(畵境)[그림의 경지]을 대변한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그의 그림 세계를 유추해 살필 수밖에 없다. 물론 양팽손이 선화(善畵)[그림을 잘 그렸음]였음은 19세기 초 김성개(金性漑)의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 화가 편에서 보이며, 이를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인용했다. 이보다 시대가 올라가 문인화가로 존재를 밝힌 기록은 문중이 소장한 「연지도(蓮芝圖)」에 첨부된 이이장(李彛章)[1708~1764]의 제발을 들게 된다.

실물을 접하지 못했으나 유복렬의 『한국 회화 대관(韓國繪畫大觀)』[문교원, 1969]에 실린 개인 소장으로 뜸부기를 그린 소품 「춘강계칙(春江鷄鶒)」에는 낙관도 보인다. 문중이 소장한 「산수도 목판」과 「매죽도 판각(梅竹圖板刻)」, 4폭이 전해지는 병풍에 속했던 「묵죽(墨竹)」, 종가에 소장된 오염이 심한 「연지도」 등이 전해진다.

목판으로 남은 산수와 매죽은 16세기 계회도 좌목 좌우에 함께 그려진 묵매(墨梅)와 묵죽(墨竹)과 함께 그가 활동한 조선 중기 화단에서 문인화가 이정(李霆)[1554~1626]과 어몽룡(魚夢龍)[1566~1617]에 의해 각기 묵죽과 묵매가 정형화되기 시작하는 시대 화풍의 선구를 보인 점에서 시선을 모은다. 이에 비해 연폭 묵죽은 죽순(竹筍)이 있는 신죽(新竹)과 풍죽(風竹) 등 계절 감각이 선명한 일괄이나 거칠고 분방한 필치이다. 화면 상단에 나는 새의 등장은 다소 생뚱맞아 보이기도 하나, 동시대 청화 백자 매조문과 연결되는 점이 보이며 조속(趙涑)[1595~1668]의 유작들과 연결이 감지된다. 「연지도」는 비교적 정돈된 필치의 기명절지(器皿折枝) 계열로 다구(茶具)까지 등장해 주목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전칭작은 기량과 화격(畵格)의 측면에서 볼 때 양팽손의 실체(實體)와 위상(位相)을 살피기에는 턱없이 미흡하다 하겠다. 따라서 양팽손이 구체적으로 호남 화단에 끼친 영향을 후배의 작품에서 읽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중에 그를 연구하고 그의 정신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현대화가 박종석(朴鍾錫) 등이 있다. 다만 일생을 묵묵히 견지한 개결(介潔)한[성품이 깨끗한] 양팽손의 삶의 자세, 이른바 문인화가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웅변하는 삶, 그 자체가 주는 시사점은 결코 작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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