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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475
한자 倭寇-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안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장소 왜구 침입 - 전라남도 화순군
성격 사건

[정의]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왜구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침입한 사건.

[개설]

고려 말에 이르면 한반도 해안 전역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졌고, 나중에는 내륙 지역까지 피해의 대상이 되었다. 왜구의 침입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고려 말에는 그 피해가 특히 심하였다. 화순 지역 역시 왜구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겪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 시대 왜구가 침입한 기록은 1223년(고종 10) 금주(金州)[현 경상남도 김해시]를 노략질을 하였다는 사료가 최초이다. 왜구의 침입은 충정왕 대에 고성과 거제 등 경상남도 해안 지역에 대한 공격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왜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약탈을 시작하여 고려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을 침입하였다.

왜구의 목적은 주로 일반 백성을 납치하거나, 생활 필수품에 해당되는 미곡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왜구가 침탈하는 지역은 곡창 지대나 조창 소재지가 대부분이었다. 왜구들은 남해로부터 서해로 들어오는 조선(漕船)을 약탈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동해안보다 서해안 지역이 더 많은 침탈을 당했다.

왜구의 출몰로 인하여 조운(漕運) 기능이 무력화되고 세곡 운반이 어렵게 되자 고려 조정은 전선을 동원하여 이를 보호하도록 하였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전라도 지역은 1350년(충정왕 2) 4월 왜선 100여 척이 대거 순천부에 침입하여 남원과 구례·영광·장흥 등지의 조선을 약탈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초까지 지속적인 피해를 당하였다.

[결과]

왜구는 고려 말에 이르러 점차 내륙까지 침입해 왔고 기병(騎兵)까지 동원하는 등 기동성을 발휘하였다. 왜구의 노략질로 인하여 미곡 생산이 급격히 감소되었으며,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여 조운이 해운(海運)에서 육운(陸運)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왕 때 이르러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지면서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 하삼도(下三道)의 여러 고을이 큰 피해를 당하였다. 특히 전라도 지역의 경우 순천·광주·장흥·낙안 등이 많은 공격을 받았고, 화순 지역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1359년(공민왕 8) 영광 및 광주 등과 함께 동복현이 피해를 입었고, 1378년(우왕 4)에는 광주와 함께 능성현화순현이 침입을 입었다. 같은 해에 왜구가 지리산으로부터 도망하여 무등산으로 들어와 규봉암에 목책을 세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화순 지역에는 철옹산성·오성산성·금오산성·예성산성·비봉산성 등이 수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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