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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자강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16
한자 韓末自强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호남 학회 설립
관련 인물/단체 호남 학회

[정의]

1900년대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관리와 지식인 등 지역 엘리트층이 주도한 자강 운동.

[1900년대 화순 지역의 상황]

19세기 말엽부터 전개된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 운동, 위정척사 운동은 점차 노골화되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무력 항쟁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를 자각하고 대신 서구 문물을 수용하면서 점진적으로 역량을 키우자는 주장이 일부 계층에서 확산되었다.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는 일부 인사들이 이런 주장에 공감하며 교육 계몽 운동 단체인 호남 학회에 참여했다. 같은 기간 일부 지방관과 지역 유지들은 새로운 지식의 전파를 위한 교두보로 학교 설립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서구 문물과 일본화 혹은 관민 협력과 친일을 동일시했던 항일 의병 운동의 기운이 팽배했던 시기와 겹쳐 일어났다. 화순 지역에서 이른바 자강 운동이 가지는 한계는 이런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호남 학회의 참여와 한계]

호남 학회는 1907년에 창립하여 1910년까지 유지되었던 계몽 단체이다. 호남 학회는 다양한 회원들로 구성된 단체였으므로 정강을 가진 정치 단체와는 성격이 달랐다. 호남 학회가 발간한 회보에 실린 글에도 글쓴이들마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달랐다. 그럼에도 이전의 위정척사 운동의 ‘저돌성’에 대한 반성과 근대 문물에 대한 보다 유연하고 수용적인 태도, 그리고 지식의 습득과 전파를 강조하는 데 대체로 일치된 관점을 보였다.

호남 학회는 5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전라남도·전라북도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었다. 호남 학회에는 화순 지역의 인사들도 다수 참여했다. 양회원·양한묵·구익모·박윤동·박영주 등이 그들이다.

호남 학회의 회원의 대다수는 일정한 지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정부로부터 일정한 직함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양회원은 학회 참여 전에 의금부 도사와 중추원 의관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양회원의 정치적 성향이나 이후 행적은 일정하지 않다. 양한묵은 1902년부터 천도교와 일정한 관련을 맺었고 이러한 경력 탓에 3·1 운동 당시에는 천도교 대표의 일원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 반면에 박윤동은 일제 강점 후에 나주 군수와 영암 군수를 지냈다.

호남 학회가 체계적으로 화순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참여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지역에서의 조직적 활동도 쉽지 않았다. 학회의 존속 기간에 화순 지역에서는 의병 운동이 오히려 더 활발해졌고 일반인들도 근대 문물의 수용 주장에 공감대를 형성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호남 학회의 모습은 1900년대 일부 지식층의 사상적 변화를 보여 주는 정도에 그쳤다.

[학교 설립 운동]

호남 학회의 활동이 화순 지역에서 별다른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한 데 비해 학교 설립 운동은 보다 가시적 성과를 보였다. 학교 설립 운동은 당시 행정 구역상 화순군과 동복군, 능주군에서 결실을 맺었다.

화순군에서는 1908년 2월경 화순 화성 학교가 설립되었다. 화순 화성 학교의 설립 과정을 보여 주는 기록은 많지 않으나 당시 학교 설립 취지서에 따르면, 지역 유지인 유상하와 박인규가 설립을 주도한 듯하다.

동복군에서는 1908년 7월 동복 동진 학교가 설립되었다. 동복 동진 학교의 설립에는 동복 군수 이사필과 군주사(郡主事) 오재형, 민간인 오재영과 오병남 등이 참여했다. 개교 당시에 학생 수는 50여 명이었다.

능주군에서는 1908년 10월 능주 육영 학교가 문을 열었다. 능주 육영 학교의 개교에는 능주 군수 민상현과 지역 유지인 주찬옥·조형택 등이 참여했다. 학교 건물은 당시 능주군 주내면 영동 마을에 있던 양사재를 활용하였다. 학생 수는 50~60명 정도였다.

[학교의 운영과 성격]

화순 지역에 설립된 세 학교의 교과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전라남도 및 인근 지역의 상황과 견주어 봤을 때 초보적인 읽기와 쓰기 외에 일부 근대 문물에 대한 소개, 실력 양성의 필요성, 이른바 사회 폐습의 개혁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학교들은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한계도 드러냈다. 가장 큰 문제는 학생의 확보였다. 지역 정서는 이러한 학교를 친일적이며 적대적인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동복 동진 학교는 비교적 쉽게 학생들을 확보하였다. 설립 과정에 동복군의 지역 유지인 다수의 동복 오씨들이 참가하면서 대부분 그 문중이나 관련 집안의 자제들이 학생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능주 육영 학교는 개교 후에도 학생들이 없어 명목상의 학교에 불과했다. 당초 학교 측은 설립과 동시에 능주 지역의 유지 집안인 제주 양씨의 자제들로 학생을 충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입학생이 적자 나중에는 일본군 헌병대의 협조를 받아 학생들을 충원했다. 또한 능주 육영 학교는 교사로 쓰던 양사재가 일본군에 강제 징발되자 부득이 객사로 학교를 옮겼는데, 이와 같은 사건은 당시 학교 운영의 불안정성을 보여 준다.

[자강 운동의 유산]

자료가 적은 화순 화성 학교를 제외하고 동복 동진 학교와 능주 육영 학교의 경우, 학교 설립 과정에 현직 군수가 참여했고 교장도 예외 없이 군수가 겸직했다. 그러나 학교는 공식적으로는 사립 학교로 운영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을 전후로 학교들은 모두 공립 학교로 전환되었다. 화순 화성 학교는 1917년 무렵 화순 공립 보통 학교로 개편되었는데 지금의 화순 초등학교화순 공립 보통 학교의 후신이다. 능주 육영 학교는 1910년 능주 사립 보통 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능주 공립 보통 학교로 개칭되었다. 지금의 능주 초등학교능주 공립 보통 학교의 후신이다. 동복 동진 학교는 1909년 동복 공립 보통 학교로 개편되었고 지금의 동복 초등학교가 그 역사를 잇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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