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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탄광 지배인 부정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40
한자 和順炭鑛支配人不定事件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화순 탄광 지배인 부정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화순 탄광 지배인 부정 사건 미군정의 진상 조사로 종결
발생|시작 장소 화순 탄광 지배인 부정 사건 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충의로 1064[복암리 893-3]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김광진|미군정

[정의]

1947년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화순 탄광 지배인이 광부들의 임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던 사건.

[개설]

광복 직후 석탄은 조선의 중추적인 에너지 자원이었기 때문에 석탄에 대한 미군정의 관심은 높았다. 화순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에 개발된 종방 탄광과 남선 탄광이 있었는데 미군정은 탄광의 운영을 맡으면서 이를 하나로 통합해 화순 탄광이라고 불렀다.

1947년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체불 임금을 지배인이 횡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미군정의 적산 관리 체제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화순 지역은 물론 광주 지역 및 전라남도 전역의 큰 관심을 샀다.

[역사적 배경]

1. 1947년 화순 탄광의 상황

화순 탄광에서는 1946년 10월부터 11월까지 식량 배급량과 임금의 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다. 파업은 전국적인 규모의 10월 폭동과 겹쳐 발생해 미군정을 크게 긴장시켰다. 따라서 파업이 종료된 뒤에 미군정은 좌익 성향의 노동 조합을 대체할 우익 노조의 설립을 추진하는 등 우익의 입김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1946년 파업의 요구 조건이었던 식량 문제와 저임금은 이듬해가 되도록 원만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고 이에 따른 긴장감이 상존해 있었다. 또한 좌익 노조의 영향력도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었다.

2. 지배인의 임명 과정

1947년 2월에 화순 탄광 지배인으로 김광진이 부임했다. 김광진은 전라남도 지역 우익 인사들의 추천을 받아 임명되었다. 지배인 임명 과정에는 미군정과 지역 인사들 간의 알력이 있었던 것 같다. 군정 측은 탄광을 국가 기간 산업으로 판단하고 직접 관리하려고 했다. 실제로 이전까지 탄광 지배인은 미군정에서 선발한 인사들을 임명됐다. 그런데 당시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지역의 자원은 지역민이 관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러한 여론이 부상하면서 미군정은 일단 김광진의 지배인 임명을 수용하였다.

[경과]

1. 횡령 소문의 확산

당시 화순 탄광은 수 개월째 광부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있었다. 총액은 300만 원이 넘었다. 김광진의 부임 후에도 체불 임금이 지급되지 않자 체불 논란은 횡령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그 동안 광부들이 저임금과 생활고를 호소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이유로 부임 직후인 김광진의 배척 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김광진은 3월 지배인직에서 전격 해임됐고 전라남도와 검찰에서는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2. 횡령 의혹의 진상

조사와 논란이 계속되었음에도 결국 지배인의 횡령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횡령했다고 알려진 300여만 원은 화순 탄광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300여만 원이 광부들의 임금으로 지급되지 못한 책임은 지배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미군정 상무부 쪽은 광부들의 임금 인상 요구를 일부 수용했음에도 정작 임금 지급은 승인을 보류한 채 계속 지연시켰다. 결국 이것이 와전되어 임금 횡령이란 의혹을 사게 된 것이었다.

정확한 진상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금 지급이 지연됐을 때 미군정에서 사태의 원인이 횡령 때문인 것처럼 발표한 사실이 있다. 이것은 다분히 횡령 의혹을 부풀리는 역할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이런 미군정의 행태에 대해 화순 탄광의 운영권을 강화하려는 계산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결과]

김광진 해임 후 미군정에서는 새로 지배인을 임명했고 체불 임금도 지급됐다. 논란의 중심이 된 김광진도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광주 지역에서 발간되던 일간지인 『동광 신문』은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보도했다. 대체적인 논조는 화순 탄광의 운영을 독차지하려는 일부 세력의 음모였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순 탄광 지배인 부정 사건은 탄광 등 적산의 운영을 두고 미군정과 우익 정치 세력 간에 일어난 권력 다툼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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