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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50
한자 五一八民主化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 5월 18일 - 5·18 민주화 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5·18 민주화 운동 - 광주광역시
성격 민주화 운동

[정의]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지역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민간인 살상에 반대하여 전라남도 화순 지역민들이 시민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거나 직접 시위 및 시민군에 참여한 사건.

[개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장악한 정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 등 정치인을 수감하거나 연금했다. 아울러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계엄군을 교내까지 배치했다. 광주 지역 전남 대학교 등지에도 계엄군이 진입했다.

다음날 항의하는 대학생과 계엄군의 대치 속에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이후 20일부터 시위에 시민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증가했고 21일에는 전남 도청에서 대규모 발포로 50여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광주 지역의 상황이 악화되어 가는 5월 18일부터 20일 사이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는 큰 사건이 없었다. 신군부가 광주 지역에 대한 언론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 해 뜬소문만이 무성했다. 그럼에도 전라남도 화순 지역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탓에 광주에서의 상황과 분리될 수 없었다.

[시민군의 무기 제공]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희생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자 무장 방어의 필요성을 느낀 시민들은 무기 확보에 나섰다. 부족한 무기 확보를 위해 일부 시위대는 광주~화순 지역 간 유일한 교통로인 너릿재를 넘어 화순군 화순읍으로 들어왔다. 광주 지역의 시위대가 화순군에 처음 온 것이었다. 시위대는 화순군 동면 경찰지서에서 총기와 탄약을 획득했다. 시위대는 화순 광업소에서도 폭발물을 입수한 후 광주 지역으로 넘어가 22일 시민군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집회]

21일 시위대는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참상을 육성으로 전하면서 화순 지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상당수 주민들이 응원하는 한편 일부 젊은이들은 시위대에 합류해 광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시위대의 일부는 화순 지역에 더 머무르며 군청과 시외버스 터미널 일대에서 광주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광주로 되돌아가던 시위대는 광주~화순 지역 사이의 고개인 너릿재의 터널 일대에서 계엄군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화순 동면 경찰 지서 무기고 탈취 사건]

1980년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화순 지역으로 진입할 것을 대비하여 지역 예비군을 소집했다. 이 때 화순 경찰서에 보관 중이던 총기를 소집에 응한 예비군과 젊은이들에게 지급했다. 총기 지급에는 화순 경찰서의 일부 경찰관도 동의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광주 상황을 접한 경찰관을 비롯한 화순 지역민들에게 계엄군의 잔학 행위에 대한 공포가 컸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비군 중대장은 곧 마음을 바꿔 총기 회수에 나섰다. 일부 총기는 회수되지 않았고 몇몇 예비군은 총기를 휴대한 채 시위대에 합류했다. 당시 회수한 총기 중 일부를 읍내 인근의 만연사에 임시 보관했는데 이를 알게 된 시위대가 이곳의 총기를 가져가 무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민주화 운동 후]

1980년 5월 27일 광주에서 계엄군은 무자비한 진압을 끝냈고 이후 항쟁 참가자들에 대한 색출이 시작되었다. 화순 지역의 참가자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자수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검거되거나 자수한 사람들은 화순 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수감자들은 여기에서 많은 가혹 행위를 당했다. 이들은 석방되고 나서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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