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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 항쟁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52
한자 六月民主抗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장소 6월 민주 항쟁 - 전라남도 화순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전두환|노태우|박종철|신민당|민정당|국민 운동 본부

[정의]

1987년 6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운동.

[개설]

1986년 아시안 게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개헌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특히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간접 선출을 요체로 하는 헌법의 존치를 발표함으로써 반대 여론을 고조시켰다. 반대 여론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5월과 6월에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역사적 배경]

1979년 12·12 쿠데타와 이듬해 헌법 개정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 정권은 민주화 세력과 시종 첨예하게 대립했다. 국민들도 신군부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 방식을 유신체제의 연장으로 느끼면서 점차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신군부 정권은 정치적 반대에 대해 지나치게 물리력에만 의존하여 다양하고 급변하는 정치 상황을 타개할 역량도 부족하였다. 4·13 호헌 조치의 발표에 대해서는 집권 세력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을 정도였다.

[경과]

1987년 5월 27일 정권의 호헌 의지에 반대하는 전국 조직으로서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약칭 국민 운동 본부]가 결성되었다. 국민 운동 본부에는 일부 보수적인 성향의 야당까지 참여했다. 특히 앞서 5월 18일 대학생 박종철의 사망이 고문에 의한 살인이었음이 알려지면서 국민 운동 본부를 중심으로 한 정권 반대 열기는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6월 10일 집권당인 민정당의 전당 대회가 열리던 날에는 전국 22개 지역에서 약 3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화순 지역에서는 4월 호헌 조치 발표 이후 야당인 신민당의 화순군 지구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습 집회가 열렸다. 6월 초에는 지구당과 5·18 동지회, 농민회 등이 지역 차원의 국민 운동 본부 결성을 논의했다. 6월 10일에는 광주의 대규모 집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 너릿재 아래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시위 확산에 대한 경찰력의 통제가 불능 상태에 빠지자 광주 지역을 오가는 시위 참가자들이 늘어났다. 일부 면사무소 직원들까지 퇴근길에 광주 지역으로 가서 집회와 시위에 참여한 후에 돌아오기도 했다.

[결과]

6월 29일 집권당은 호헌 의사를 포기했고 야당 인사에 대한 정치적 해금 등을 발표했다. 이후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졌으나 야당 진영의 분열과 지역주의 투표로 결국 집권당의 후보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또한 이어지는 총선에서 집권당이 완패했음에도 집권당과 일부 야당이 합당하여 전반적으로 6월 민주 항쟁의 성과가 희석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6월 민주 항쟁은 향후 민간 정부의 등장 및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 등 민주화의 디딤돌을 놓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을 이전의 억압적인 상황으로 돌리기 어렵게 만든 큰 기틀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6월 민주 항쟁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다양한 집단과 계층이 이러한 가치를 위해 결집하여 의사를 표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참여 지역과 규모도 1919년 3·1 운동 이후 최대라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6월 항쟁은 이후에 점진적인 정치 민주화뿐 아니라 사회 분위기 전반에 민주주의적 가치가 고양 및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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