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741
한자 和順光山李氏承旨公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지강로 655[앵남리 656-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비문 지은 연대 1537년 -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 비문 지음
비음 지은 연대 1574년 -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 음기 지음
건립 시기/일시 1576년 8월 15일연표보기 -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3월 16일연표보기 -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62호로 지정
현 소재지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지강로 655[앵남리 656-1]지도보기
성격 묘갈명
양식 호패형 석비
관련 인물 이달선|윤구|이산해|이이
재질 석재
크기(높이,너비,두께) 196㎝[높이]|59㎝[너비]|22㎝[두께]
소유자 광산 이씨 종중
관리자 광산 이씨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62호

[정의]

조선 시대 승정원 좌부승지를 지낸 이달선의 묘갈명.

[개설]

조선 시대 문장가이자 문관이었던 이달선(李達善)[1457~1506]의 묘갈명으로 둘째 아들 이공충이 1576년(선조 9)에 세웠다. 비문은 윤구(尹衢)[1495~?]가 1537년에 지었고, 글씨는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썼다. 뒤쪽의 음기는 1574년(선조 7)에 이이(李珥)[1536~1584]가 지었다.

[건립 경위]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이달선의 둘째 아들 이공충이 1537년(중종 32)에 윤구에게 청하여 비문을 받았으나 바로 세우지는 못하였다. 1573년(선조 6)에 이달선의 손자 이중호(李仲虎)[1512~1554]가 호남 절도사가 되니, 규례에 따라 이달선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叅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추증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추가하여 이이가 1574년에 비음기를 짓고, 이어 1576년(선조 9) 8월 15일에 도덕산 묘소에 비문을 새긴 묘갈을 세웠다.

[위치]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도덕산 아래에 있다. 화순군청에서 서쪽으로 지방도 55호선을 따라 8㎞ 거리에 있는 국립 전남 학숙[화순읍 자강로 679] 곁에 광산 이씨 사당인 오현당, 영모각과 함께 있다.

[형태]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의 높이 196㎝, 너비 59㎝, 두께 22㎝이다. 널찍한 사각 받침 위에 비몸을 세웠다. 비몸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었으며, 아래로 점차 내려오면서 좁아지는 호패형이며 묘갈명으로는 지붕돌[屋蓋石]을 얹지 않았다. 비몸 윗부분에 ‘증승지이달선묘갈명(贈承旨李達善墓碣銘)’이라는 두전(頭篆)이 있으며 전면의 비문은 호남 삼걸로 알려진 윤구(尹衢)가 지었다. 윤구이달선의 손자인 이중호의 장인이기도 하다. 글씨는 시·서·화의 삼절이며 문장팔대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산해(李山海)가 썼다. 송설풍(松雪風)의 호쾌하고 유려한 필치의 글씨는 비교적 마모가 심하지 않고 판독이 용이하여 자획과 필의(筆意)를 살피는 데 어려움이 없으며 이산해의 글씨에 나타난 높은 품격을 읽을 수가 있다. 음기(陰記)는 이이(李珥)가 지었다.

[금석문]

비몸의 위쪽에 ‘광산이씨승지공비(光山李氏承旨公碑)’라는 두전이 있으며 첫줄의 비제 ‘유명 조선국 통훈대부 장악원 정 지제교 이공 숙인 안씨 쌍묘 비명 병서(有明朝鮮國 通訓大夫 掌樂院 正 知製敎 李公 淑人 安氏 雙墓 碑銘 幷序)’에 이어 비문을 지은이[宣務郎 前守弘文舘修撰 知製敎 兼經筵檢討官 春秋舘記事官 尹衢]와 글씨를 쓴 이[通政大夫 司諫院大司諫 知製敎 李山海]가 나온다. 비제로 미루어 배위(配位)인 안요경(安堯卿)의 딸 숙인 안씨와 쌍묘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 본문에는 광산 이씨의 이순백(李珣白), 이기(李奇), 이홍길(李弘吉), 이영(李暎), 조부 이선제(李先齊), 부친 이형원(李亨元)으로 이어지는 선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어 이달선의 출생과 문과 급제[1486년], 관직, 혼인, 2남3녀의 자녀를 적고 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이공충이 부친 이달선이 세상을 뜬 뒤 32년 되던 해[1537년]에 윤구에게 비문을 청한 내용에 이어 명문이 있고, 끝에 비를 세운 연대[1576년]가 있다. 비음은 1574년(선조 7)에 이이가 썼는데, 1573년에 이달선의 손자인 이중호가 호남 관찰사가 되면서 이달선의 관직이 추증되는 것을 기록하고, 그 이전 30여 년 전에 받아 둔 윤구의 묘갈명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새겼다는 내용도 적고 있다.

윤구의 명문(銘文)에 이달선의 행적이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을 지킴에 절조가 있었으니 청렴을 근본으로 삼았다네.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으니 문장으로 소문이 퍼졌다네. 남을 시기하지도 않았고 복록을 구하지도 않았으니 위태롭고 혼란한 세상에서도 몸을 온전히 보전했다네. 자손들에게 청렴과 결백을 물려주셨거늘, 세상 사람들은 어찌 물려준 것이 없다고 하는가. 아! 선생 같으신 분은 옛 성현들 중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분이라네.”

[현황]

화순 광산 이씨 승지공비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1988년 3월 16일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측면 각 1칸의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보호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관리 주체는 광산 이씨 승지공파 종중이다.

[의의와 평가]

이이와 같은 대문호가 비문을 짓고 당대의 명필로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글씨를 쓴 조선 전기의 금석문이면서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금석학적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