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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 국사 유적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747
한자 眞覺國師遺蹟碑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향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178년 - 혜심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234년 - 혜심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진각 국사 유적비 건립
현 소재지 진각 국사 유적비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향청리 지도보기
성격 유적비
양식 귀부|비몸|이수
관련 인물 진각 국사 혜심
재질 석재[화강암]
크기(높이,너비,두께) 380㎝[총 높이]|205㎝[비몸 높이]|73㎝[너비]42㎝[두께]
소유자 화순군
관리자 화순군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향청리에 있는 화순 출신 진각 국사를 기념하는 유적비.

[개설]

화순 남산 공원에 있는 고려 시대 수선사(修禪社) 2세 사주인 진각 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의 유적비이다. 비문은 고려 시대 이규보(李奎報)[1186~1241]가 왕명으로 지은 것이며 진각 국사의 태생지인 화순 향청리에 1992년 건립하였다.

[건립 경위]

진각 국사 유적비는 고려 시대에 왕명으로 이규보가 지은 진각 국사 비의 비문을 강동원이 『진각 국사 어록』 부록편에서 확인하여 진각 국사의 태생지인 적천리[현 화순읍 향청리]에 1992년 9월에 세웠다.

[위치]

진각 국사 유적비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화순군청에서 800m 거리로 국민 건강 보험 사거리, 자치샘 사거리를 지나 화순 남산 공원 오르는 길에 있다.

[형태]

진각 국사 유적비는 현대에 세운 비이지만 좌대, 귀부, 비몸돌, 이수를 갖추고 있다. 앞면에 ‘진각 국사 유적비’라 1행으로 새기고 옆면과 뒷면을 돌아가면서 비문을 새겼다. 마지막 부분에 비문 글씨를 쓴 사람과 건립의 경위를 적었다. 글씨는 함안인 조용민이 썼고, 『진각 국사 어록』의 부록편에서 찾아서 국사 출생지에 비를 세운다는 강동원의 기문이 있다.

[금석문]

앞면에 ‘진각 국사 유적비(眞覺國師遺蹟碑)’라 1행으로 음각하였고, 비면을 돌아가면서 비문을 새겼다. 비문 내용은 고려 시대에 왕명으로 이규보가 지은 진각 국사의 비문을 앞부분에 그대로 새겼다.

비문은 진각 국사가 화순에서 향공 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뒤 보조 국사 지눌(知訥)에게 출가하여 간화선을 수행하고 보조 국사에 이어 수선사의 제2세 사주가 되어 고려 강종(康宗)의 지원으로 수선사를 확장하고 집정자 최우는 두 아들을 국사에 출가시키는 등 연관을 맺고 월등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진각 국사는 입적하자 입적처인 월등사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거두어 본산인 송광사에 돌아가 광원암에 탑을 세웠다 하였다. 진각 국사의 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법명은 혜심(慧諶)이다.

마지막 부분에 비문 글씨를 쓴 사람과 건립의 경위를 적었다. 이에 따르면 ‘고려 고종 22년 을미(1235년) 평장사 판예부 한림원 소신 이규보가 왕명을 받아 지은 것을 함안인 조용민이 삼가 쓰다. 위의 비문은 『진각 국사 어록』의 부록편에서 찾아냈는데 국사께서 태어나신 화순읍 적천리 지금의 향청리에 이 비를 세우다. 때는 대한 광복 뒤 48년 임신(1992년) 9월 진양인 강동원이 삼가 기록하다[高麗 高宗二十二年乙未 平章事 判禮部 翰林院 小臣 李奎報 宣撰 咸安 趙鏞敏 謹書 上碑文 見於國師語錄附錄編 今敢摭出刻碑 樹之於師所生」和順跡泉里 現鄕聽里 時 大韓光復後 四八年 壬申 九月 日 晋陽 姜東元 謹記]’라는 내용이다.

비문은 『동문선』 제118권과 『동국 이상국 전집』 제35권에 ‘조계산 제이세 고 단속사 주지 수선 사주 증시 진각 국사 비명 병서 봉선술(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幷序 奉宣述)’이라는 제명으로 실려 있다. 『동국 이상국 전집』에는 ‘비석에 새길 때 비면이 좁기 때문에 산삭하기를 청하였고, 여기에는 예전 것대로 하였기에 두 본이 같지 않다.’는 주석이 있어 고려 시대에 현지에 건립되었던 비와 문헌상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고 여겨진다. 고려 시대의 비는 비문상에서는 ‘입적처인 월등사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거두어 본산인 송광사에 돌아가 광원암에 탑을 세웠다 하였다.’고 하였으나, 비석은 강진 월남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글씨는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세웠다 한다.

그리고 『조계 진각 국사 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에도 비문이 실려 있는데, 이 비문을 확인하여 화순에 세운 것이다.

[현황]

현대에 세운 화강석의 비로서 보호 시설물은 따로 없지만 보존 상태는 아주 양호 하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공원 입구에 자리를 마련하여 관리도 잘 되고 있다. 관리 주체는 화순군이다.

[의의와 평가]

현대에 세운 비이지만 고려 시대 문장가 이규보가 지은 진각 국사의 비문을 찾아서 그대로 새겨 세웠기 때문에 고려 시대 불교사와 화순의 향토학 현장을 알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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