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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오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846
한자 和順吳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집필자 김덕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264년 - 화순오씨 시조 오원 화순 입향
본관 화순오씨 - 전라남도 화순군
입향지 화순오씨 입향지 - 전라남도 화순군 삼천동
세거|집성지 화순오씨 세거지 - 전라남도 화순군
성씨 시조 오첨
입향 시조 오원

[정의]

오원(吳元)[1193~1265]을 시조로 하는 전라남도 화순군의 세거 성씨.

[개설]

보성군(寶城君) 오현필(吳賢弼)의 셋째 아들 오원(吳元)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때 오원이 화순으로 입향하고 그 후손들이 화순에서 대를 이어 살면서 본관을 화순으로 하였다.

[연원]

화순오씨의 선조는 500년(신라 지증왕 1)에 중국 제(齊)나라에서 귀화한 오첨(吳瞻)이다. 오첨이 함양 땅에서 신라 김씨인 김종지(金宗之)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이로써 귀화 성씨로 오씨의 기원이 되었다. 오첨의 23세 손 오수권(吳守權)은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해주군(海州君) 현보(賢輔), 차남 동복군(同福君) 현좌(賢佐), 3남 보성군(寶城君) 현필(賢弼)이 1216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보성군(寶城君) 현필(賢弼)의 셋째 아들 오원(吳元)이 화순군(和順君)에 봉해지고, 그가 화순에 머물면서 화순오씨(和順吳氏)의 시조가 되었다.

[입향 경위]

오첨의 25세손인 오원은 1193년(고려 명종 23)에 태어나 1216년(고려 고종 3)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 참지정사 등을 지내던 중 1237년 전라도 순문사로 임명받았다. 이때 김경손과 함께 전라도 광주, 담양, 화순 등지에서 일어난 이정년 일당을 토평(討平)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화순군(和順君)에 책봉되었다. 오원(吳元)은 개부의동 삼사 판병부사(開府儀同三司 判兵部事)에 추증(追贈)되고 충숙(忠肅)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1264년(고려 원종 5) 안성군에서 화순군 남쪽 삼천동에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 묘소의 위치는 알 수 없나 모충사(慕忠祠) 뒤에 숭모제단에 배향되어 있다. 화순오씨의 부조묘(不祧廟)이자 공희공(恭僖公) 오사충(吳思忠) [1327~1406]의 사당인 모충사(慕忠祠)는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581-8에 있다.

[현황]

4세 오광량(吳光亮)[1252~?]은 충열왕(忠烈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 숭록대부(崇祿大夫)[종1품]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양평(良平)이다. 5세 오연(吳衍)[1269~?]은 충의왕 4년(1312)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좌정승(左政丞)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정2품]를 지냈으며,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6세 오한정(吳漢正)[1287~?]은 충숙왕(忠肅王) 3년(13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사마(中司馬), 한림학사(翰林學士),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정2품]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良)이다. 7세 오순(吳洵)[1306~?]은 충혜왕(忠惠王) 2년(1341)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연일현령(延日縣令), 영원부사(寧遠府使),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하고 판 전중내급사에 재임 중 공민왕 원년(1352) 조일신(趙日新) 일당이 거병하여 왕권을 침탈하자 이인복과 함께 조일신 일당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워 진현전대제학(進賢殿大提學)[정2품]에 책봉되고 양경(良敬)의 시호를 받았다. 『동문선(東文選)』에 「망삼각산(望三角山)」, 「강두(江頭)」 등의 작품이 전한다. 8세 오사민(吳思敏)[1330~?]은 공민왕 3년(1354)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삼중대광대부 판병부사(三重大匡大夫判兵部事)[종1품]를 지냈다. 시호는 정양(貞襄)이다. 9세 오헌(吳憲)[1352~?]은 태조 원년(1392)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으로 출사하여 태종 18년(1418)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세종 원년(1419) 대마도의 왜적을 토멸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책봉되어 충의(忠懿)의 시호를 받았다. 9세 오천(吳천[糹+遷])[1358~?]은 태종 14년(1414)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우도 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종2품]를 역임하였다. 10세 오용린(吳容麟)[1382~?]은 태종 10년(1410)에 문과 급제하여, 삼사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호조참의(戶曹叅議),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叅判)[종2품]을 지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11세 오구학(吳龜鶴)[1402~?]은 세종 15년(1433)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병조참판(兵曹叅判)[종2품]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2세 오잠(吳岑)[1428~?]은 세종 29년(1447)에 문과급제하여, 창평현령,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병마절도사(慶尙兵馬節度使)[종2품]를 지냈다. 16세 오경상(吳景祥)[1542~?]은 선조 18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절충장군(折衝將軍), 병조참의(兵曹叅議)[정3품]를 역임하였다. 17세 오응정(吳應井)[1559~?]은 선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내금장, 도총부도사, 전라방어사 겸 문안사를 지냈다. 남원성 방어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도총관(都摠管)[정2품]에 추증되었으며,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1637년 오난쇠(吳難金)[1599~?]와 오응립(吳應立)[1608~?]은 무과 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15년 오성유(吳聖兪)[1680~?]는 1721년 사마시(司馬試) 식년시에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성균관 직강, 목천현감, 제주목판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예조정랑(行禮曹正郞) [정3품]을 역임하였다. 오상린(吳尙麟)[1710~?]은 1741년에 식년시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1786년 오점(吳霑)[1764~?]은 사마시 식년시에 3등으로 급제했다. 1834년 오태직(吳泰稷)[1807~?]은 사마시 식년시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 주택 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의 화순오씨는 3,952명이고, 화순군에 거주하는 화순오씨는 7명이었다.

[관련 유적]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에 조선 시대 화순 오씨의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오사충(吳思忠)[1327~1406]은 고려 후기,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조선의 개국 공신 중 한 사람이다. 오사충 사후에 “입각도형 입비기공(立閣圖形,立碑紀功)” 하라는 태조의 명에 따라 부조묘의 전사판은 세종때 최초 경기도 양주에 세워졌으나 여러 전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화순오씨 종중에서는 화순오씨의 부조묘(不祧廟)를 모충사(慕忠祠)라 하여 2001년 10월에 전북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581-8 에 새로 건축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3.23 [현황] 내용 업데이트 <동문선>에 실린 오순 작품 추기
2018.01.24 인구수 최근 통계치 반영 2015년 인구총조사 통계치 반영
2018.01.15 내용 수정 수정 요청 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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