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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응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904
한자 梁應台
이칭/별칭 숙전(叔躔),후포(後圃)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수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양응태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3년 - 양응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52년 - 양응태 예조 정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53년 - 양응태 해미 현감, 성균관 전적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65년 - 양응태 동래 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69년 - 양응태 안변 부사 제수
묘소|단소 양웅태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주도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제주(濟州)
대표 관직 동래 부사|예조 참의

[정의]

조선 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숙전(叔躔), 호는 후포(後圃). 양담(梁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고,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며, 어머니는 금산(錦山)김씨 김섬(金銛)의 딸이고, 부인은 광산 김씨이다. 양응정(梁應鼎)의 형이다.

[활동 사항]

양응태(梁應台)[?~?]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여 문사를 일찍 성취하고, 경전의 뜻을 깊이 탐구하여 막힘이 없었다.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이 그를 시험하여 어려운 질문을 반복하였으나 막힘이 없이 응대를 하니 크게 칭찬하고 원대한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고봉 기대승, 미암 유희춘과 도의의 사귐이 있었다. 1540년(중종 35) 아우인 양응정(梁應鼎)과 함께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1543년(중종 38)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52년(명종 7)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고, 1553년(명종 8)에 해미 현감(海美縣監)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1565년(명종 20) 9월에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고, 1569년(선조 2)에 안변 부사(安邊府使)를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예조 참의(禮曹參議)와 정주 목사(定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옥하관에서 우연히 풍랑을 만나 죽었다.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패를 내려 예장(禮葬)하였다.

[묘소]

묘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주도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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