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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907
한자 金濤
이칭/별칭 장원(長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권수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62년 - 김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71년 - 김도 명나라 제과 합격, 동창부 안구승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73년 - 김도 고려로 돌아옴
활동 시기/일시 1376년 - 김도 밀직제학 파직
활동 시기/일시 1378년 - 이인임 등 김도 탄핵
몰년 시기/일시 1379년연표보기 - 김도 옥사
추모 시기/일시 1727년 - 김도 유허비각 개성에 건립
유허비 김도 유허비각 (金濤遺墟碑閣) - 황해북도 개성시 동흥동 나복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밀직제학

[정의]

고려 후기 동복현에 우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장원(長源). 외가는 동복(同福)이다.

[활동 사항]

김도(金濤)[?~1379]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공민왕 임인년(136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해년(1371년)에 명나라에서 천하의 선비들을 금릉(金陵)에서 시험할 때 정언(正言)으로써 응시하여 을과로 합격하고, 동창부 안구승(東昌府安邱承)에 제수되었으며, 미백(米帛)과 오고석갑(烏古昔甲)을 하사받았다. 2년을 머물러 있다가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오니, 공민왕이 칭찬하고 사간 응교(司諫應敎)에 발탁하고 곧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김도장원나복산인(金濤長源蘿葍山人)’이라는 8자를 써주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기고, 그 사는 곳을 ‘팔자동(八字洞)’이라고 불렀으며, 당시에 목은 이색이 칭찬한 글이 있다. 지금도 개성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우왕이 즉위하자 김도는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서 좌사의(左舍議) 유순(柳珣), 기거사인(起居舍人) 박상진(朴尙眞),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안종원(安宗源) 등과 함께 환관의 정치 간여를 금지하는 내용의 글을 도당(都堂)에 올렸다. 또한 좌사의 안종원, 보궐(補闕) 임효선(林孝先), 정언(正言) 노숭(盧嵩) 등과 함께 왕에게 김흥경(金興慶)과 그 일당인 왕백(王伯)·안소(安沼)·정귀수(鄭貴壽) 등을 내쫓고 유신(維新)의 정교(政敎)를 펼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김흥경이 언양(彦陽)으로 귀양을 갔으며, 그의 집이 몰수당하였다.

김도는 1376년(우왕 2) 12월에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오르고, 이듬 해 3월에는 지신사(知申事)로서 국자감 시관(國子監試官)이 되어 정전(鄭悛) 등 99인을 뽑았으며, 곧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찬성사 홍중선(洪仲善)과 어울려 반대세력을 비판해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379년 그의 가노(家奴)가 연경궁(延慶宮) 옛터의 돌을 훔친 일로 이인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환관 이득분(李得芬)의 도움으로 화는 면했으나, 같은 해 7월에 양백연(楊伯淵)의 옥사에 연루되어 효수 당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전라도 동복현의 우거(寓居)조에 의하면 김도의 문생(門生) 10여 인이 시체를 보호하였는데, 이종(李悰)이란 자가 시체를 안고 냇물에 들어가 피를 씻긴 뒤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삿자리로 싸고, 그의 머리를 망(網)에 넣어 달아매고서 두 번 절하고 가니,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김도의 죽음을 원통하게 여겼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이색(李穡)이 「상찰찬(上札讚)」을 지은 것이 남아 있고, 김도의 후손이 1727년에 유허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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