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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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健 |
이칭/별칭 | 백서(白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수용 |
활동 시기/일시 | 1480년 - 조건 생원시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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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조건 은거 |
묘소|단소 | 조건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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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昌寧) |
대표 관직 | 교수 |
조선 전기 기묘사화로 화순 에 낙향하여 은거한 문신.
중종 때의 문신으로, 조광조의 칭찬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은거하였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백서(白墅). 옥천군(玉川君) 공희공(恭僖公) 조흡(曺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시어사(侍御史) 조연(曺衍)이며, 아버지는 화순 입향조인 사의(司議) 조온(曺穩)이다. 경주인(慶州人) 이정손(李貞孫)의 딸과 혼인하였다.
조건(曺健)[?~?]은 화순 출신으로,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후 문과에 합격하여 남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오성지(烏城誌)』[1760경]에는 음사(蔭仕)에 기록되어 있고, 『화순군지』[1980]부터는 문과(文科)에 기록되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를 바로잡아 학문을 열심히 하고, 경재잠(敬齋箴)[퇴계 이황의 가르침]으로써 밤낮으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이학(理學)에 깊고 예경(禮經)에 밝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매우 칭찬하였다. 사직하고 남쪽으로 돌아가자, 조광조가 우리의 도가 남쪽으로 갔다고 말하였다.
기묘사화[1519] 이후로는 자연 속에 자취를 감추고 수석 사이에서 소요(逍遙)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다. 화순군 화순읍 녹구리에서 화순읍 안지실로 이거하였다.
『상우록(尙友錄)』 2권을 저술하였다.
화순읍 다지리 지곡(智谷)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