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하윤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930
한자 河潤九
이칭/별칭 여옥(汝沃),금사(錦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수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0년연표보기 - 하윤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하윤구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하윤구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6년연표보기 - 하윤구 의병 활동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하윤구 금사정 건립
몰년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하윤구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진주(晉州)
대표 관직 전적(典籍)

[정의]

조선 후기 화순 동복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옥(汝沃), 호는 금사(錦沙). 군수(郡守) 하치(河治)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군(參軍) 하대표(河大豹)이며, 어머니는 경주 배씨(慶州裵氏)이다.

[활동 사항]

하윤구(河潤九)[1570~1646]는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기우가 단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하길 좋아하였다. 문장을 일찍 성취하여 약관의 나이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택당 이식(李植), 백주 이명한(李明漢) 등과 친밀하였으며, 1615년 대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김포 현관(金浦縣館)에 들렀다가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벽상(壁上)에 「대인륜시(大人倫詩)」를 남기고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

1633년(인조 11)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율봉 찰방(栗峰察訪)에 이어 전적(典籍)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운암 이흥발(李興浡)의 격문을 받아보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소모사 정홍명(鄭弘溟)을 도와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뒤 다시는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동복에 금사정(錦沙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집으로는 『금사집(錦沙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참판 유최기(兪最基)가 묘지(墓誌)를 찬술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