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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146
한자 獨立運動家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한규무

[정의]

근대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나 타지 출신으로 화순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

[개설]

화순에서의 독립운동은 한말의 의병 투쟁과 자결 순국, 일제 강점기 3·1 운동광주 학생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화순에서 전개된 각종 독립운동은 물론, 지역적으로 인접한 광주에서의 각종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도 여럿이다.

국가 보훈처 독립 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2013년 5월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화순 출신 인물은 80여 명이다.

[의병 투쟁]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전라도에서는 노사학파(蘆沙學派)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이 장성에서 최초로 거의(擧義)하였다. 이에 화순 출신인 정의림(鄭義林)이 거의하여 기우만의 장성 의병과 나주에서 합류하였고, 서상룡(徐相龍)유인석(柳麟錫)의 제천 의병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화순 출신의 문달환(文達煥)양재해(梁在海)가 화서학파(華西學派) 최익현(崔益鉉)이 일으킨 태인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태인 의병의 지도부인 ‘12의사’로 활동하였으나, 일본군에 붙잡혀 2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태형 100도의 처벌을 받았다.

1907년 정미조약 이후에는 화순 출신인 김경문(金景文)·송인덕(宋仁德)·이관회(李貫會)·장인초(張仁初) 등이 안규홍(安圭洪) 의병 부대, 박치일(朴致一)·장인초는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 박화중(朴化中)·이원중(李元仲)·정영진(鄭永珍)고광순(高光洵) 의병 부대, 박덕삼(朴德三)은 이석용(李錫庸) 의병 부대에 참여하였으며, 민치도(閔致道)는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이밖에 1906년 화순군 이양면에서 양회일(梁會一)을 중심으로 거의(擧義)한 쌍산 의소(雙山義所)는 전남의 대표적 의병 부대이다. 그 구성원들은 화순을 중심으로 보성·정읍·남원 출신이 다수였으며, 쌍산 의소가 해산된 후에도 다시 치열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자결 순국]

1910년 경술국치 직후 화순 출신인 송완명(宋完命)과 송주면(宋宙勉)은 자결 순국하여 일제의 병탄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출하였다.

[비밀 결사]

일제의 강점 이후 1910년대에 화순 출신의 김용상(金鏞相)·양재홍(梁在鴻) 등은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전남 일대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김용상(金鏞相)·이승정(李承正) 등도 같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전남 해남 출신으로 화순에 거주하던 천도교인 양한묵(梁漢黙)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가 옥사하였다. 그의 인척인 양회준(梁會俊)은 3월 13일 능주에서 김정렬(金正烈)·주재영(朱在英) 등과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조국현(曺國鉉)은 갱미산에서 산상 시위를 주도하였다.

능주 출신인 정광호(鄭光好)는 일본 유학 중 귀국하여 광주에서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김금석(金今石)·박창규(朴昌奎)·주장암(朱張岩)·주형옥(朱亨玉) 등도 화순 출신이었다.

이듬해인 1920년 2월에는 읍내 시장에서 천재섭(千在燮)이 “조선 독립 만세”라 쓰여진 격문을 붙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에는 화순 출신인 노형규(盧衡奎)·조병렬(曺秉烈) 등이 광주와 화순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광주 학생 운동]

1926년 11월 광주에서 결성된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醒進會)를 계승하여 1929년 2월 광주 고등 보통학교·광주 농업 학교·전남 사범 학교 학생들은 비밀리에 사회 과학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여기에 화순 출신인 조길룡[광주 농업 학교]·주경석[광주 고등 보통 학교]이 참여하였다. 이어 6월에는 이들 학교에 독서회가 조직되었는데, 회원 중 화순 출신은 조계현·주경석[광주 고등 보통학교], 조길룡[광주 농업 학교], 이덕우·홍귀주[전남 사범 학교] 등이었다. 이밖에 화순 출신인 박형기[광주 고등 보통학교]와 조병의[광주 농업 학교]도 독서회 회원이었다고 한다.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 출신과 독서회 회원들이 항일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화순 출신으로 조계현·주경석·민영흥·박형기·서형윤·오연복·오훈택·유기성·조백현·김진용[광주 고등 보통학교], 조계현[광주 농업 학교], 이덕우·홍귀주[전남 사범 학교] 등이 항일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목포에서의 항일 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된 정찬규[목포 상업 학교]도 화순 출신이었다. 이밖에 화순 출신으로 평소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 정신을 일깨웠던 광주 고등 보통학교 교사 송홍(宋鴻)은 1930년 2월 교단을 떠나야 하였다.

[독립 유공자 현황]

2013년 5월 현재 국가 보훈처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은 화순 출신 독립운동가는 모두 71명이다. 아직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과 타지 출신으로 화순에서 활동한 인물들도 상당수 있다.

[의의와 평가]

화순 출신 인물들은 한말인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자극받아 일어난 제1차 의병 전쟁[1896]을 비롯하여 제2차 의병 전쟁[1905] 및 제3차 의병 전쟁[1907]에도 계속 참여했다. 또 경술국치[1910]에 분개하여 자결 순국한 인물들도 배출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3·1 운동광주 학생 운동에서 다수의 화순 출신 인물들이 활동했고, 청년 운동·농민 운동·노동 운동 등도 타지에 못지않게 활발했다. 따라서 화순 출신 인물은 개항기~일제 강점기 각종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전남 지방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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