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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179
한자 宋泰會
이칭/별칭 염재(念齋),염재(恬齋),염인(念人),염재산인(念齋山人),염옹(念翁),평숙(平叔),염재거사(念齋居士),호산후인(壺山後人)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종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송태회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41년 2월 6일연표보기 - 송태회 사망
출생지 송태회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 지도보기
성격 서화가
성별
본관 여산(礪山)
대표 경력 고창 고보 교사

[정의]

근대 화순 출신의 서화가.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평숙(平叔), 호는 염재(念齋)·염재거사(念齋居士), 또는 염재옹(念翁)으로도 불렸다. 아버지는 송긍면(宋兢勉)이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 교육에 헌신한 서화가로 근대 호남 화단의 마지막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로 일컬어지고 있다.

[활동 사항]

송태회(宋泰會)[1872~1941]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재성을 발휘하여 학문에 통달하고 사리가 밝아 여러 사람들의 사표가 되었다. 22세에는 성균관 경학과 유생으로 뽑혀 유학하였으니 학문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의 부정부패와 외세의 침략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책을 덮고 붓과 벼루를 벗 삼아 마음을 달래며 시·서·화에 몰두하여 끊임없는 탐구 정신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같은 해에 과거 급제를 한 인연으로 매천 황현의 삶과 사상에 힘입어 민족 교육의 길에 뜻을 두었다. 대한 매일 신보 기자로 잠깐 있다가 1920년에 고창으로 이거하여 고창 고등 보통학교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오랜 세월 민족 교육에 헌신하였다.

송태회고암 이응노의 최초 스승이자 위창 오세창, 의재 허백련 등과 교류하였으며 많은 우국 지사들과 교류하며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송광사의 금명 대사와 인연이 깊어 여러 사찰 및 유서 깊은 정자에 편액 글씨를 많이 남겼다. 특히 시문(詩文)이 뛰어나 말년에는 화론 및 다양한 논문 36편을 남겼으며 근대 회화사에서 명성을 날렸던 서화가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염재 문집』 7권 3책[미간행 필사본]과 작품으로는 「송광사 지전도」, 「고창 고등 보통학교 부근 풍경도」, 「금강산 12경도」, 「무이 구곡도」, 서예 작품 「성산기」, 「도화원기」, 「동계기」 등 많은 현판과 금석문이 남아 있다.

[묘소]

묘는 전라북도 고창군 반암리 마명 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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