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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251
한자 曹夢實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세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연표보기 - 조몽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조몽실 협률사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조몽실 조선 음악단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조몽실 조선 창극단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조몽실 박후성 국극협단 참여, 지방 순회공연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49년연표보기 - 조몽실 사망
출생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거주|이주지 광주시 광산군 서창면 화계동
성격 판소리 명창
성별
대표 경력 국극협단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출신의 판소리 명창.

[개설]

국극 협단에 참여하였고, 「심청가」가 장기인 판소리 명창이다.

[활동 사항]

조몽실(曹夢實)[1900~1949]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 살았던 공창식에게 판소리를 배웠는데 특히 「심청가」를 전수받았다. 그 후 국창 김창환의 문하에서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3년간 독공했다.

조몽실은 본래 성음이 탁한 데다가 성량 또한 부족하여, 목을 얼마 동안 쓰게 되면 목이 쉬어서 소리를 계속 할 수 없었다. 이에 실망한 조몽실은 독공하는 도중에 몇 번을 죽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밤이 깊어 인적이 끊어지고 산에서 산짐승이 울기 시작할 때면, 목욕 재계하고 산으로 올라가서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앙화를 두려워 모시는 어떤 망령의 무덤' 앞에 합장기도하며, "혼령이 계시거든 저의 소원을 풀어주소서."하고, 기원하고 나서 소리를 시작하여 먼동이 틀 때까지 「심청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계속 되풀이했다. 이렇게 3년 동안 피나는 수련으로 목을 얻어 수리성에 귀성과 애원이 깃든 성음으로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1935년 상경하여 협률사에 참여하였는데 송만갑, 이동백 등의 법통과 창제에 대한 까다로운 생트집이 비위에 거슬렸고, 또 자신의 기예를 발휘할 기회도 없어서 얼마 후 서울을 등졌다. 그리고 1940년에는 조선 음악단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조선 창극단으로 옮겼다. 그러나 조선 창극단에서는 창극 「장화 홍련전」을 공연하였으므로 판소리 전통을 고수하는 조몽실에게는 자신의 지닌바 기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그때까지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몽실이 명창으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947년이었다. 박후성의 국극 협단에 참여하고 지방 순회 공연을 하게 되면서, 막간에 「심청가」를 불러 명성을 떨쳤다. 심봉사가 곽씨부인을 잃고 심청을 안고 다니면서 동네 부인의 젖을 얻어 먹이며 키우는 대목, 심청이 부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3백 석에 몸이 팔려, 남경 장사 선인들에게 끌려가는 부녀의 영결하는 대목, 심봉사가 타루비를 부여안고 심청을 부르면서 우는 대목에서는 청중의 눈시울을 적시던 절창이었다.

1949년 조몽실은 단장 박후성과 단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국극협단을 그만두고, 한동안 방랑의 나그네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음력 섣달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의 부인은 외동딸과 둘이서 광주시 광산군 서창면 화계동에서 살고 있었다.

그 해 섣달 그믐날, 그의 부인과 딸이 부엌에서 제수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조몽실은 그날 아침부터 술에 취하여 온종일 울면서 「심청가」를 부르다가, 그대로 쓰려져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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