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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488
한자 雙峰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산의로 459[증리 741]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영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수|중창 시기/일시 1094년경(고려 소성 연간) - 쌍봉사 중건
중수|중창 시기/일시 1628년 - 쌍봉사 대웅전 중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37년 - 쌍봉사 명부전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77년 - 선익 화상 쌍봉사 명부전 시왕상과 사천왕상 제작
중수|중창 시기/일시 1690년 - 쌍봉사 대웅전 중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94년 - 쌍봉사 극락전 아미타 삼존불 봉안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94년 - 쌍봉사 대웅전 석가불 봉안
중수|중창 시기/일시 1724년 - 쌍봉사 대웅전 중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4년 - 쌍봉사 대웅전 화재로 소실
중수|중창 시기/일시 1986년 - 쌍봉사 대웅전 중건
현 소재지 쌍봉사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산의로 459[증리 741]
성격 사찰
창건자 철감 선사
전화 061-379-3514
홈페이지 www.ssangbongsa.com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쌍봉사는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인 적인 선사(寂忍禪師) 혜철(惠哲)이 839년 2월에 중국에서 귀국하여 최초로 하안거(夏安居)를 지낸 곳이 무주(武州) 관내 쌍봉사라는 견해가 있어 이에 따르면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철감 선사 도윤(道允)[798~868]이 주석하면서 사세가 크게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철감 선사는 중국 소주(蘇州)[창건 비문에는 소주(韶州)라 기록됨] 쌍봉사에서 도를 깨치고 돌아와 이 절에 주석하면서 절의 이름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쌍봉사의 창건자나 연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철감 선사 도윤의 호는 쌍봉(雙峰), 시호는 철감(澈鑑)이다.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8세 때 출가하였다.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배우고 825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남천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이어받고 847년에 귀국하였다.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개산조로 화순 쌍봉사로 이거하여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868년 71세로 입적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쌍봉사의 사세는 계속되어 소성 연간(紹聖年間)(1094~1097)에 혜조 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유명한 승려가 다수 배출되었다. 예종(睿宗)의 서자(庶子)로 혜조 국사에게 출가했던 광지 대사(廣智大師) 지인(之印)쌍봉사에서 전륜대장(轉輪大藏)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쌍봉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최씨무인 집권기(崔氏武人執權期)이다. 최우(崔瑀)는 1219년에 자신의 아들 최만전(崔萬全)최만종(崔萬宗)을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혜심(慧諶)에게 보내 출가시켰는데, 최만전쌍봉사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여 쌍봉사의 사세는 융성하게 되었다. 절에는 많은 승려들이 거처하였고 여러 사찰을 관할 하에 두고 있었으며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선 시대 쌍봉사성종 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의 『능주 읍지(綾州邑誌)』까지 모든 지리지에 유존 사찰로 수록되어 폐사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세종 대에는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하였고, 세조는 잠저(潛邸) 시에 쌍봉사에 친임(親臨)한 인연으로 1475년에 쌍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서(御書)와 5결의 전지(田地), 조세 면제(租稅免除), 승려 잡역(僧侶雜役) 일체를 면제해 주어 더욱 확고한 사찰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성종의 지원이 있었으며, 연산군 때에는 쌍봉사에서 지낸 수륙제(水陸祭)에 향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숙종은 어필 병풍(御筆屛風)·대롱촉(大籠燭)·청류병(靑流甁)·황유리잔(黃琉璃盞)·금침장(錦寢帳)·향로 향합(香爐香盒)을 내렸고, 경종은 전지 4결을 내렸으며, 영조는 어필 병풍(御筆屛風)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왕실의 끊임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죽수 서원(竹樹書院)의 속사(屬寺)가 되면서 조세 부담이 많아져 쌍봉사의 유지가 어려웠던 것 같다. 죽수 서원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능주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조광조(趙光祖)를 배향(配享)한 서원으로 쌍봉사죽수 서원의 사향(祀享)에 따른 제반 물품을 부담하고 서원의 보수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이후 쌍봉사에 대한 갖가지 징수가 그치지 않자 정조 대에 승려들이 호소하였고, 그에 따라 「전라도 능주 쌍봉사 교폐 절목(全羅道綾州雙峯寺矯弊節目)」이 내려졌다. 그동안 쌍봉사가 부담한 세역은 통신사(通信使)·사은사(謝恩使)·심양사(瀋陽使)·동지사(冬至使)를 위한 부담, 중추부(中樞府)·규장각(奎章閣)·수어청(守禦廳)에 제공하는 부담, 수영(水營)이나 병영(兵營)·능주목(綾州牧)에 부담하는 물품, 죽수 서원에 부담하는 물품, 향교에 부담하는 물품 등 모두 66항목에 이르렀다.

한편 임진왜란쌍봉사는 여러 차례 불사가 이루어졌다. 1628년 요의 선사(了誼禪師)가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637년 수인(守印)이 명부전을 짓고 지장보살과 시왕탱화를 봉안하였다. 1650년 웅준(雄俊)이 동부도(東浮屠)를 만들었고, 1677년에 선익 화상(善益和尙)이 명부전 시왕상과 사천왕상을 만들었으며, 1679년에는 동쪽 기슭에 불묘(佛墓)를 만들어 구리로 만든 비로자나 삼존불을 묻었다. 1688년에는 수열 선사(守悅禪師)가 치달루(致達樓)를 만들었고, 1690년에 대웅전 중건 불사를 하였다. 1694년 극락전에는 아미타 삼존불을, 대웅전에는 석가불을 봉안하였다. 1724년 치현(致玄)이 대웅전을 3차 중수하고, 1761년 일규(一奎)가 동 부도와 서 부도를 중수했으며, 1774년 불유청(佛油廳)·상경청(上京廳)·잡물청(雜物廳)·삼보청(三寶廳)·본전청(本箋廳) 등을 건립하였다. 1786년에는 「쌍봉사 사적비(雙峯寺寺蹟碑)」를 건립하였으며, 1802년에는 우철(禹轍)이 『쌍봉사 기념 합록(雙峯寺記念合錄)』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쌍봉사는 대흥사의 말사(末寺)로 편재되어 본사(本寺)의 사격(寺格)을 잃었고, 1935년에는 오백 나한상을 백양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6·25 전쟁으로 사찰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고 대웅전극락전만 남은 사찰이 되었다.

삼층 목탑식 전각이었던 대웅전은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었으나 1984년 소실되어, 1986년 예전의 실측 자료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1994년에는 연못을 복원하였고, 이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활동 사항]

쌍봉사의 정기 법회는 매월 초하루와 18일 지장제 일에 이루어지는데, 각 법회에는 50여 명의 신도가 참여하고 있다.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명찰 순례단을 운영하고 있고, 매주 첫째 주 토요일에는 불교 기초 교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신도 모임은 3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선우회에서는 독거 노인의 집수리 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쌍봉사에서는 참가자를 수시로 모집하여 템플 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는데, 산사 체험과 휴식의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한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2013년 현재 쌍봉사에 거주하는 승려는 2명이고, 신도 수는 1,000여 명이다. 쌍봉사 내 전각으로는 삼층 목탑의 형식을 가진 대웅전극락전·나한전·지장전·호성전·일주문·사천왕문·요사가 있다. 대웅전에는 목조 석가 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 좌상이 있으며, 나한전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 나한 인왕상, 지장전에는 지장 삼존도와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호성전(護聖殿)에는 철감 선사 도윤과 중국 남천보원(南泉普願)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찰 입구 왼편에는 쌍봉사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사찰 뒤편 언덕에는 철감 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관련 문화재]

쌍봉사의 지정 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 철감 선사탑(澈鑑禪師塔), 보물 제170호 철감 선사 탑비(澈鑑禪師塔碑), 보물 제1009호 능성 쌍봉사 감역 교지(綾城雙峯寺減役敎旨), 보물 제1726호 화순 쌍봉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 유형 문화재 제251호 대웅전 목조 삼존 불상, 지방 유형 문화재 제252호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문화재 자료 제66호 극락전과 쌍봉사 사적비, 부도 등이 남아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