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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정에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2088
한자 玄鶴亭-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용두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민정중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7년[추정]연표보기 - 현학정 건립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92년연표보기 - 민정중 사망
배경 지역 현학정 -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용두리 지도보기
성격 칠언 고시
작가 민정중(閔鼎重)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용두리에 있는 현학정에서 민정중이 읊은 한시.

[개설]

한시 「현학정에서」의 작가 민정중(閔鼎重)[1628~1692]은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으로, 시문집 『노봉문집(老峯文集)』이 전한다.

시의 배경인 현학정화순군 춘양면 용두리 산중턱에 있으며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중재실(中齋室)이 있다. 처사 정근(鄭謹)이 세운 것으로, 민정중현학정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다. 민정중은 암행어사로 전라도 지역을 다녀 온 적이 있고, 전라남도 장흥에 유배된 적이 있어 화순의 현학정에 직접 들렀을 가능성이 높다. 현학정을 세운 정근의 생몰 연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정근의 현학정 건립과 관련하여 「현학정과 정처사 이야기」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대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진주 정씨가 한 명 있었는데, 나라 안이 뒤숭숭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의분을 참지 못한 정씨는 마을에서 1㎞쯤 떨어진 예성산(禮城山) 밑의 베틀 바위 꼭대기에 정자를 하나 짓고 홀로 기거하며 처사 생활을 하였다. 속세를 멀리 한 정처사(鄭處士)는 용두골에 있는 자기 집과 정자에 두 줄의 모시 줄을 달아놓고 밥, 술, 안주 그리고 편지의 왕래를 이 줄로 이용하였다. 간신히 가족들이 안부를 살피려거든 쪽지에 글을 적어 이 줄에 부쳤고, 하루 세끼 사이에 술과 안주, 그리고 친구들의 안부도 이 줄을 통하여 연락하였다. 몇 해가 지나 올린 밥과 쪽지가 그대로 되돌아와 집 안 사람들은 깜짝 놀라 정자를 찾아가보니 정처사는 없고 정자에 유혈만 낭자해 있었다. 정처사가 죽은 뒤로 정자만 쓸쓸히 남아 있었는데 정자에는 검은 학 한 마리가 매일 아침 일찍 찾아와 하루 종일 정자를 배회하고 놀다가 돌아가곤 했다. 뒷사람들이 정자를 현학정(玄鶴亭)이라 하고 봄 가을에는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으며 정처사의 애절한 영혼을 위로하여 주었다."

이러한 전설을 통해 정근이 병자호란 때 생존했던 인물이고, 현학정은 1637년경에 지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정근이 병자호란의 패전에 상처를 받고 속세를 떠나 은거하기 위해서 건립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구성]

칠언 율시 형식이다. 처음에는 현학정 주변의 한가로운 풍경을 묘사하였다. 이후 왕자진, 장자, 정자진 등의 고사에 빗대어 정자를 찾은 감회를 표현하였다.

[내용]

가파창랑보석두(歌罷滄浪步石頭)[창랑가 읊조리며 돌 머리 돌아드니]

노면사안석연수(鷺眠沙岸夕煙收)[모래언덕에 해오리 졸고 저녁연기 걷히네]

수지화표천년학(誰知華表千年鶴)[화표교에 날아와 노래하던 천년 학이]

갱반강남백척루(更返江南百尺樓)[강남의 높은 누대에 다시 올 줄 뉘라서 알았으랴]

월하청소의자진(月下淸簫疑子晋)[달 아래 맑은 젓대소리 왕자진 아니련가]

원중뢰수몽장주(園中牢睡夢莊周)[동산에서 잠이 드니 꿈꾸는 장자여라]

중수구사소요지(重修舊舍逍遙志)[옛 집을 손질하고 소요하는 그 뜻은]

쟁사당시곡구후(爭似當時谷口侯)[어찌하여 곡구의 정자진에 비할손가]

‘화표(華表)’는 정영위(丁令威)란 사람이 죽어 천년 만에 다시 학이 되어 요동성(遼東省)에 있는 화표교(華表橋)에 날아와 앉아 노래를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자진(子晋)’은 6조 시대(六朝時代) 왕자진(王子晋)을 말하는데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곡구(谷口)’는 땅의 이름으로, 중국 당나라 때 정자진(鄭子眞)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곡구란 땅에 숨어 살았으므로 호를 곡구라 하였다. 여기서 인용된 말이다.

[특징]

수(收), 루(樓), 주(周), 후(侯)의 운자를 사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요한 현학정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또 중국 정영위란 사람이 천년 만에 다시 학이 되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검은 학의 정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형상화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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