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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리가 품은 가야금 산조의 명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A030304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선영숙 출생 1954년 - 선영숙씨,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다.
선영숙 가야금 시작 1969년 - 선영숙씨, 본격적인 가야금 수업에 들어가다.
선영숙 혼인 1978년 - 선영숙씨, 혼인하다.
연정국악연수원 세움 2001년 - 선영숙씨가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 연정국악연수원을 세우다
가야금 예능보유자 지정 2010년 - 선영숙씨,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제47호 예능보유자가 되다.
화순군 풍류문화축제 참가 2010년 10월 - 선영숙과 야사리 마을주민들이 화순군 풍류문화축제에 참가하여 2등상을 타다
마을지 호남 연정 국악 연수원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무등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야사리에 있는 호남 연정 국악 연수원]

무등산규봉암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초입에 ‘연정 국악 연수원’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라남도 무형 문화재 가야금 산조 제47호 예능 보유자 선영숙 명인이 살고 있다. 처음에 그곳을 찾을 때는 국악 연수원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양옥집의 외관에다 마을 가운데 들어서 있어서 이곳이 맞나 싶었지만, 이내 마을의 다른 집들과 나란히 모양새를 맞추고 있는 것에서 내심 선영숙 명인의 깊은 속뜻을 읽을 수 있었다.

선영숙 명인이 이곳에 국악 연수원을 연 것은, 여름과 겨울이면 한 달씩 깊은 산을 찾아서 제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데 매번 악기를 실고 다니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차라리 한 곳에 정착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였다고 한다.

“야사리가 (지형적으로) 깊은 곳이죠. 제가 굉장히 마음이 여려가지고, 쪼그만 잎사귀 하나에 마음이 빼앗겨요. 처음 야사리에 들어오는 길에 단풍이 빨갛게 들었는데, 그 단풍이 햇빛에 반사돼 비치는데 길이 너무 너무 이쁜거에요. 이뻐가지고 오는데 여기오니 개천에 물이 막 흐르고, 여기 또랑이 찰랑찰랑 흐르면서... 아이고! 여기구나, 싶었어요.”

제자들과 함께 공부할 곳을 찾던 중, 우연히 지나가다 보게 된 야사리의 아름다운 풍광. 그것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웠으면 지나가던 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묶어버렸을까. 내친김에 선영숙 명인은 계속해서 ‘연정’이라는 국악원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준다.

“연정은 임연수 선생님의 호에요. 연정 선생님이 대전과 공주, 상주에 연정 국악원을 만드셨는데, 호남은 없었어요. 연정 선생님이 우리 부부를 친자식처럼 생각하시는 관계로 선생님의 호를 넣어서 짓게 되었네요.”

연정 임연수 선생, 그리고 야사리의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화순군에서는 또 하나의 든든한 문화 자원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

[가야금의 명인 인간 문화재 선영숙]

선영숙 명인은 1954년 전남 고창에서 태어났다. 가야금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웠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 소아마비에 걸려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게 된 것이 시작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가야금에 매달리게 된 때가 열여섯이 되는 해였다고.

“가야금 소리가 정말 미치도록 좋더라고요. 그때 열여섯 살 때였는데, 그때부터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했죠. 임동선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열여섯 살의 소녀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가야금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빠져 산 결과 지난 2010년에 드디어 가야금 산조(김병호류)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선영숙 명인은 남편과 두 아들 모두 국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

[야사 마을 사람들과의 소통하다]

선영숙 부부가 처음부터 야사리 주민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외지인을 향해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하는 주민들을 접하면서 처음에 선영숙 씨 부부는 몹시 당황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야사리 주민들에게 징, 장구, 꽹과리, 민요 등을 무료로 가르치는 강습을 실시하면서부터 서서히 그 벽이 허물어지게 되었고, 이듬해에 화순군 풍류문화축제에 야사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출전하면서는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야사 마을 주민 임미향 씨는 처음 연정국악원에서 장구나 민요를 가르쳤을 때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기회가 돼서 비교적 젊은 사오십대 20명 정도가 화순의 풍류 축제에 참가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때 저녁 시간에, 한 일곱 시 쯤 해서 장구 장단이라든가 민요라든가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꾸준히 선생님이 가르치셨죠.

우리 국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근데, 우리 문화재 선생님도 계시는데 못배우면 아깝잖아요. 그래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배우면서 우리 국악의 맛깔스러움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아무래도 선생님이 여기서 행사 같은 것도 많이 하시거든요. 국악행사나 문화행사를 많이 하셔요. 그럴 때마다 시골에서는 나가서 볼 수가 없잖아요. 볼 시간도 없을뿐더러 나갈 기회도 없잖아요. 근디 이 가까운데서 전혀 비용도 필요 없이 내 발품만 팔면 얼마든지 볼 수가 있고. 그런다고 해서 행사가 간단한 행사라든가 수준 낮은 행사가 아니고 너무 고급스러운 행사인거에요. 인자 그런 문화혜택을 많이 받고 있죠. 평생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이런 풍류도 알고,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고 그런 것이죠.”(임미향)

임미향 씨의 말대로 이제 국악원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야사 마을 주민들을 비롯한 인근의 시골사람들도 수준 높은 문화공연을 멀리 나가지 않고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선영숙 명인의 바람과 진심이 점점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선영숙 명인의 바람대로 야사 마을 사람들은 농한기에는 스스럼없이 국악원의 문을 열고 가서 장구며 가야금을 배우곤 한다. 선영숙 명인은 이곳 이서면에 들어온 이래, 시간이 갈수록 이서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이서면의 관광 자원과 연결을 해서 국악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정보제공]

  • •  선영숙(여, 1954년생, 이서면 야사리4구 갑동 마을 주민)
  • •  임미향(여, 1964년생,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주민)
[참고문헌]
  • 디지탈 화순 뉴스(http://www.dhs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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