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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마을 둘러보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B010000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복암리 구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라윤

[먹바람 따라 형성된 화순 탄광 마을]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충의로를 따라 달리는 길은 여느 시골 풍경과 다르지 않다. 녹색의 들녘과 푸르른 산새를 지나는 바람이 시원하다. 그러다 천덕1교를 지나 넘은골을 오르면 도로 양쪽으로 검은 흙과 경석더미가 눈에 들어오며, 내리막 지점에 화순 광업소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전라남도 유일의 탄광, 대한 석탄 공사 화순 광업소이다. 고생대 석탄기층의 평안계 사동통이 분포하여 전라남도 유일의 화순 탄광을 형성하였다.

녹색의 땅 전라남도에 검은 흑토재와 광업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소 생소하겠지만, 화순 인근 지역에서 화순 광업소와 탄광 마을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다. 탄광이 개발되면서 산골 마을은 탄광 마을로 변모했고, 탄을 캐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도와 도로 주변으로 광부들의 사택이 지어지고,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오동리 천운 마을부터 복암리 구암 마을까지 약 2㎞ 거리에 탄광 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샘골, 먹골, 넘은골이라 불리던 산간 마을 오지에 탄광 산업이 본격화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다. 면방직공장이었던 종연 방적이 화순 무연탄 주식회사를 인수하고[1934년], 종연 광업 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화순 탄광은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도로와 산업 철도가 정비되고, 주변에 가옥들이 배열되는 가촌(街村) 형태의 마을이 생겨난 것이다.

먼저 화순 광업소와 가장 가까운 구암 마을은 집단적 사택은 아니지만 호황기 때는 12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작은 상점 자리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암 삼거리는 최고의 번화가였다. 현재는 사택이 남아 있지 않아 탄광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대한 석탄 공사 노동조합 화순 지부’와 ‘대한 석탄공사 복지관[구암장]’이 구암 마을에 있다.

다음으로 화순 광업소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천운 마을이 위치한다. 본래 오곡 마을이었던 곳에 영빈관인 천운장, 간부 사택, 화순 광업소 복지 문화관[천운[장] 극장터], 화순 광업소 부속 병원, 화순 광업소 운동장 등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분리되어 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탄광 노동자들을 위한 아파트와 사택이 들어서면서 천운 마을은 탄광 마을의 중심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천운교를 건너 철길을 따라 형성된 동암 마을이다. 동암 마을은 화차가 다니는 화순선[복암선]을 따라 광부들을 위한 소규모 일반 사택이 건립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광업소 사택은 10여 년 전 모두 철거되어서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마을 곳곳에 과거를 품은 탄광 마을]

화순 탄광 마을은 말 그대로 석탄밥을 먹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석탄 산업의 호황기에는 탄광 마을도 활기를 띄었지만, 석탄 산업의 사양화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떠나고 탄광촌의 풍경도 사라져갔다. 하지만 검은 분진이 짙은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탄광촌의 삶과 이야기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탄광 마을 곳곳에서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고, 예전 활기 넘치던 마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천운 마을은 면단위에서 보기 힘든 화순 오동 사택 아파트가 한눈에 들어오고, 마을 앞 도로를 따라 상점들이 늘어서 화려했던 지난날을 생각하게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천운장, 문화관, 병원이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데,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터는 남아 천운 마을이 왜 ‘화순의 강남’이라 불렸는지 짐작케 한다. 천운 마을 안쪽에는 화순 광업소 운동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고, 마을 곳곳에 화순 광업소 간부 사택 등이 남아 있다. 당시 상점 거리에는 식당, 술집, 양복점 등이 있었고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구암 마을은 화순 광업소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석탄과 관련된 흔적들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화순 광업소부터 마을 입구까지 이어진 상점 자리들이 과거 번화했던 탄광 마을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마을 건너편에는 ‘석탄 산업 종사자 추모 공원’이 새롭게 조성되어 있고[2012년], 마을길 양쪽으로 ‘대한 석탄 공사 노동조합 화순 지부’와 ‘대한 석탄 공사 복지관[구암장]’이 자리한다. 예전 광부들의 사택은 사라지고 잘 정비된 천운 마을 회관과 주택들이 자리했지만, 집 앞에 쌓여있는 연탄재가 여전히 탄광 마을의 풍경을 이룬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을 수는 없는 곳…]

탄광 노동자들은 30℃를 오르내리는 지하 갱도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 검은 탄가루를 마시며 무거운 등짐을 나르는 것도 고역이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고가 노동자들을 위협한다.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탄광일은 빈손으로 와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신체 건강한 젊은 남성들이 탄광촌으로 모여들었고, 한때 화순 광업소 취업 경쟁률이 10대 1도 넘었다고 한다.

보성에서 농사짓다가 돈 벌러 광업소에 취직한 정종근 씨, 안 해본 일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다 지금은 광업소 베테랑이 된 최병철 씨,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광업소에서 일한 박덕중 씨 등 전국 팔도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화순 광업소로 모여들었다. 1960~70년대 석탄 산업의 부흥과 경기 호황으로 탄광 마을은 젊은 노동자들로 활기찼고, 1980년대 후반에는 석탄 산업 종사자 수만 2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탄광 노동자들은 고된 하루를 동료들과 함께 막걸리 한잔 마시며 마무리하고, 주말이면 화순 광업소 복지 문화관[천운[장] 극장터]에서 영화 상연과 공연을 관람하며 쌓인 피로를 풀었다. 월급날이면 탄광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했고, 탄광 노동자들의 씀씀이는 화순군과 광주까지도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1989년 정부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석탄 산업은 사양화된다. 일자리를 잃은 탄광 노동자들은 마을을 떠났고, 번화했던 상점 거리의 상인들도 하나둘 문을 닫고 떠났다. 또한 많은 이들이 광업소와 탄광 마을에서 돈을 벌고는 정착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났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나이든 광부들은 진폐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뜨거웠던 석탄불처럼 씩씩했던 탄광 마을은 그렇게 조금씩 사그라졌다.

[탄광 마을에서 부는 정겨운 바람]

현재 탄광 마을에는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강아지는 없지만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꽃길로 꽃향기가 가득하다. 주변마을까지 시끌벅적했던 요란함은 아니지만 마을 회관은 모인 주민들로 여전히 북적거린다. 과거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서인지 오히려 마을주민들 간에 우애와 정이 깊다.

지금은 탄광 마을 주민들 중에 화순 광업소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많아야 10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탄광 노동자들의 안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굴암제를 매년 함께 지내고, 체육 대회나 마을 행사에 참여한다. 또한 주민들은 연료로 비싼 기름보다 화력 좋은 연탄을 때며, 예전부터 즐겨먹던 돼지비계 말이, 돼지 내장국 같은 음식들을 함께 해먹는 것도 여전하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흑토재에서 석탄을 캐듯, 화순군 탄광 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다.

[참고문헌]
  • 두산 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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