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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화 솜이 뭉실 뭉실했던 도장 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C010104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옥희

[다섯 번을 매야 끝나는 목화농사]

도장 마을은 대도시인 광주에서 자동차로 1시간이 채 안 걸리는 곳이지만 칠구재를 넘어 도곡 평야를 지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산골 마을이다. 산들로 둘러싸인 도장 마을은 예부터 논보다 밭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밭농사 중심으로 농경 행위가 이루어졌다. 근래에 도장 마을에서는 옥수수가 대표 밭작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목화 농사가 가장 중요했었다고 한다. 도장 마을이 밭노래 마을로 별칭을 정한 이유도 목화밭을 매면서 부른 민요 등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화에서 얻어낸 미영베[무명베]로 가족들 옷을 지어 입히고, 남는 것은 팔아서 생계에 보태고 자식들 교육도 시킬 수 있었다. 현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60세 이상 주민들은 거의 다 목화 농사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목화 농사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 도장 마을에서 목화 농사는 양력 3월 달 경부터 시작되었다. 보리밭 이랑에 목화씨를 뿌리는데 보리가 팰 무렵에 파종을 한다.

“우리 마을에는 보리 안 팬 3월 없다는 말이 전해요”(김범순)

3월부터는 보리가 다 패기[이삭이 피다] 때문에 이때가 목화씨를 뿌리기에 적기이다. 김범순 씨가 하는 말은 보리 패는 시기를 몰라 목화 파종 시기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강조하는 속담이다.

목화씨를 뿌릴 때에는 보리밭 고랑을 쇠스랑으로 긁은 뒤 씨를 뿌리고 다시 흙을 덮어준다. 보리를 벨 때쯤이 되면 땅 위로 목화 싹이 올라온다. 두 작물이 겹치지 않게 시기를 정해 보리 농사와 목화 농사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농사 지식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목화 잎이 올라오면 남자들은 목화밭에 퇴비를 해준다. 퇴비는 돼지나 소를 기르면서 나오는 부식물을 지푸라기, 풀과 섞어 만든 천연 거름이다.

마을의 아낙들은 그때부터 목화밭 매기에 전념한다. 목화밭 사이에 있는 보리뿌리를 캐어내고 어느새 돋아나 있는 풀도 매어준다. 목화밭 매기는 다섯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무척 고된 일이다.

"미영밭[목화밭]을 다섯 번을 매. 그래야 미영[목화]을 따. 그것이 고약해. 겁나 일이 많애라[많아요]."(김재님)

여럿이 품앗이로 목화밭을 매다보면 주거니 받거니 민요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름이 되어 목화 순이 자라면 순을 쳐주어야 한다. 순을 쳐주지 않으면 목화가 위로만 자라서 다래가 많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8월 정도에 목화 꽃이 피기 시작하면 목화밭은 아름다운 꽃밭이 된다. 흰색, 분홍색의 목화 꽃은 이십 안팎의 처녀처럼 고운 꽃이다. 꽃이 지면 곧 다래가 열리기 시작하는데, 어린 다래는 아이들을 유혹하는 달콤한 간식거리이다. 단맛에 취해 다래를 따먹다 보면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다래 따 먹으면 문둥이 된다고 못 따먹게 했어요.”(김범순)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목화인 만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따끔한 충고가 필요했다. 어른들의 이 말은 귀중한 목화솜을 지키기 위한 속 깊은 방편이었다.

[도장 마을 미영베가 안 나오면 남평장이 안 된다]

9월부터 목화가 박속같이 방긋 방긋 벌어지기 시작하면 10월 경에 목화를 따서 말린다. 혹시라도 목화가 비에 젖으면 색깔이 변해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서둘러 목화 껍질을 까서 목화를 빼낸다.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일들이 뒤따른다. 씨 앗기, 고치 말기, 물레질, 꾸리 감기, 베 날기, 베 매기, 베 짜기 등 도장 마을 여성들은 밤에도 잠 잘 시간이 부족했다. 같은 실로도 베를 성글게 짜면 여러 필의 베가 나오고 촘촘하게 짜면 적은 필의 베가 완성되기 때문에 적절하게 조정하는 기술도 필요했다.

미영베를 짜면 시장에 내다 파는 일도 여성들의 몫이었다. 정성스럽게 짠 베를 머리에 이고 남평장으로, 능주장으로 수십리 길을 걸어서 베를 팔았다. 다행히 도장 마을에서 짠 베는 늘 인기리에 팔렸다.

“도장 마을 등 도암에서 목화를 팔러 나오지 않으면 남평 장이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요.”(김성인)

미영베를 팔아서 가정에서 사용할 생필품도 구입하고 자녀들의 학자금으로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도장 마을 어머니들은 베를 팔기 위해 수 십리 길을 다니면서도 하루 종일 쫄쫄 굶었다고 한다. 점심값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목화밭 대신 옥수수밭]

이렇듯 도장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생업 수단이던 목화는 1980년대 석유 화학 섬유가 일반화되면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목화 값이 떨어지자 밭 작물은 목화에서 다른 작물로 변화되었다. 고추, 콩, 팥, 감자, 고구마 등이 선호되는 작물이었고 2000년대 들어와서는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가가 크게 늘어났다. 도암면 일대에서 찰옥수수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도장 마을에서도 대규모로 옥수수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생긴 것이다.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가는 작물은 경작하기가 쉽지 않다. 근래에 일손도 적고 소득이 높은 옥수수가 선호되는 이유이다. 도장 마을에서 진행하고 있는 농촌체험에서는 초등학생이나 도시인들을 대상으로 옥수수 따기 등이 체험 프로그램으로 활용되고 있다.

목화농사가 끝나면서 어머니들의 밭노래도 점차 잊혀져갔다. 자연적인 전승 현장은 사라졌지만 도장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도장 마을 목화 밭노래는 화순군을 대표하는 무형 문화재이며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무형 문화재로 자리 매김이 되었다. 도장 마을 주민들은 도장리 밭노래를 부를 때 마다 목화밭 가득했던 옛 도장 마을의 모습을 떠올린다.

[정보제공]

  • •  김범순(남, 1938년생, 도장골 밭노래 한마당 축제 위원장)
  • •  김성인(남, 1958년생, 도암 역사 문화 연구회장, 도장 밭노래 마을 영농 조합 법인 총무)
  • •  김재님(여, 1930년생,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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