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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마을 열부와 효자에 얽힌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C010204
분야 종교/유교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옥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대 1962년 - 신와진주김공효행비를 건립했다.
현대 1977년 - 진주형씨삼효기적비를 건립했다.
현대 1979년 - 효부남평문씨기적비를 건립했다.
현대 1980년 - 진주김씨삼효자기적비를 건립했다.
현대 1997년 - 진주하씨효열비를 건립했다.
마을지 신와진주김공효행비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정천 조개바위 위쪽
마을지 효행비 4기가 세워진 마을입구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해망산교 마을입구

[합동 세배를 올리는 마을의 전통]

도장 마을은 매년 설날 아침에 어른들에게 합동 세배를 올리는 미풍양속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깊어서인지 도장 마을에는 이름난 효자와 열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온다.

해망산교를 건너 도장 마을 아내미길에 들어서면 비석 7기가 나란히 서있다. 마을입구에서부터 유서 깊은 도장 마을의 분위기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7기 중에서 4기가 효열비이다. 한문으로 쓰인 비문에는 유인 진주 하씨 효열비(孺人晋州河氏孝烈碑), 진주 김씨 삼효자 기적비((晋州金氏三孝子紀蹟碑), 효부 남평 문씨 기적비(孝婦南平文氏記蹟碑), 진주 형씨 삼효자 기적비((晋州邢氏三孝紀蹟碑)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도장 마을 앞으로 흐르는 정천에 있는 조개 바우 위쪽을 보면 신와 진주 김공 효행비(信窩晋州金公孝行碑)가 세워져 있다.

[후손에게 대물림 되는 효열의 전통]

도장 마을 회관에 계신 어르신들께 효열비의 내력에 대해 물으니 진주 형씨 형시창 씨가 먼저 말문을 여셨다.

“진주 하씨 할머니여. 꽃다운 나이에 혼자되셨어. 남매를 나셔갖고 재가할지도 모르고 시부모 모시고 살았어라우. 재가도 안하시고 고생하시면서 남매를 잘 키웠다고 비를 세웠다고 합디다.”(형시창)

‘진주 하씨 효열비’의 주인공인 진주 하씨 할머니는 진주 형씨 가문에 시집 와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다. 홀로 갖은 고생을 하며 남매를 키워냈고 시부모 봉양에도 정성을 다 했다. 진주 하씨의 효열은 그 자식들에게 이어져 자식들도 어머니를 봉양함에 있어 지극정성을 다했으며 다시 대를 이어 손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진주 김씨 김종옥 어르신께서 말을 이었다.

“김생규 씨 거가 효자인데. 그 양반 아버지도 효자상을 받았어요. 진주 하씨는 군에서 공적 조사해서 비를 세운 것이고. 흘미[김생규] 아재는 능주 원님한테 효자상을 받었다고 합디다. 김생규 씨는 자기도 어렵지만은 명절이면 노인들한테 김이라도 돌리고 봉초[담배]라도 돌리고. 쉬운 일이 아니여. 그 분을 위해서 자식들이 효행비를 세웠어.”(김종옥)

마을 어른들에게도 성심을 다해 칭찬이 자자했던 故 김생규 씨의 아버지가 바로 조개 바우 위쪽에 세워진 ‘신와 진주 김공 효행비’의 주인공이다. 비문에는 신와공의 효행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신와공은 부모를 위해 가마니를 짜서 50리나 되는 영산포 시장에 내다팔아 반드시 좋은 반찬을 사다 드렸다고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삼년동안 예를 다하고 부모가 때려도 원망치 않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삼년 동안 예를 다 하니 고을 원님이 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비문에는 그의 부인도 시부모를 효성으로 받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부부의 효를 아들인 김생규 씨가 이어받으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효자가 대물림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진주 김씨 삼효자’ 비문에는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삼형제가 밤낮으로 부축하여 불편함이 없게 하고 똥을 맛보아 병의 상태를 살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공동체가 운영하는 요양 시설을 꿈꾸다]

도장 마을에서는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린 마을의 전통을 바탕으로 노령화된 농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마을 공동체 사업이 잘 되면 요양시설까지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지금 마을이 자연 양로원이 되어 버렸잖아요. 아무리 좋은 자식들, 효성이 지극한 자식이어도 부모를 모셔가지는 않더라고요. 그분이 식사를 못하시거나 하면 요양원으로 보내더라고요. 지금 70대 되신 분들이 ‘우리 요양 병원으로 가야 돼? 그러지 말 고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될까?’라는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마을 공동체가 거기까지 책임을 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의 모델을 만들면 참 좋다는 생각을 해요.”(유정자)

마을의 나이 드신 분들이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 복안이다. 마을 차원에서 주민들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거동이 힘든 노인 분들을 요양 병원으로 보내지 않고 마을 자체적으로 마을 노인들을 모시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요양 병원의 시설이 훌륭하다고 해도 평생 동안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노인들은 마을을 떠나는 순간 불안의식을 느끼게 되며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자식들도 요양 병원에 맡긴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자주 찾아뵙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소규모로 요양 시설을 운영하여 마을의 어르신들을 모신다면 편안함과 행복감을 잃지 않는 신개념의 요양 병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장 마을에서 먼저 시작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하면 다른 마을에까지 확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장 마을이 꿈꾸고 있는 마을의 미래이다.

[정보제공]

  • •  김종옥(남, 1924년생,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주민, 진주 김씨 후손)
  • •  유정자(여, 1962년생, 도장 밭노래 마을 영농 조합 법인 사무장)
  • •  형시창(남, 1937년생,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주민, 진주 형씨 후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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