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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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谷寺 |
영어공식명칭 | Bonggoksa Temple |
이칭/별칭 | 석가암(釋迦庵),석암사(石庵寺),봉서암(鳳棲庵)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도송로632번길 138[유곡리 595]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용윤 |
건립 시기/일시 | 고려시대 추정 - 봉곡사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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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중창 시기/일시 | 1646년 - 봉곡사 현재의 위치에 중창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794년 - 봉곡사 중수 |
개칭 시기/일시 | 1794년 - 석암사에서 봉곡사로 개칭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825년 - 봉곡사 요사 중수 및 2층 누각 신축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872년 - 봉곡사 요사채 후방 10여 칸 증축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31년 - 봉곡사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봉곡사불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2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봉곡사불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3년 7월 20일 - 봉곡사대웅전및고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3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봉곡사대웅전및고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최초 건립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
현 소재지 | 봉곡사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도송로632번길 138[유곡리 595] |
성격 | 사찰 |
창건자 | 도선(道詵)[827~898] |
전화 | 041-543-4004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 소속 사찰.
[개설]
봉곡사(鳳谷寺)는 아산시 봉수산 북쪽 산능선의 갈매봉 동쪽 중턱에 자리한 고려시대 사찰이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건립 경위 및 변천]
봉곡사는 아산 지역의 대표적 고찰 중 하나이지만 그 내력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부분 구전이다. 887년(진성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근거 기록은 없으며 사찰 명칭도 알 수 없다. 고려 의종 대에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 조선 전기에 함허(涵虛)[1376~1433]가 중창하였다 전하고, 이 시기 여러 산내 암자가 있을 정도로 사세가 컸다고 전하나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중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석암사 재송악산(石菴寺在松岳山)"[석암사는 송악산에 있다.]이라는 내용이 지금까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원래는 근처 다른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 위치가 어디인지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사찰이 모두 전소하고 1646년(인조 24)에 현재 위치에 중창되었다.
1760년대의 『여지도서』「온양군읍지」에는 "석암사 재군남이십리 송악산(石庵寺在郡南二十里松岳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1794년 중수 과정에서 봉곡사로 개칭하였다 전해진다. 1795년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봉곡사 방문 기록이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런데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온양서암지봉곡사(溫陽西巖之鳳谷寺)", 「봉곡사술지시서(鳳谷寺述志詩序)」에 "온양지봉곡사(溫陽之鳳谷寺)", 정약용 자찬 「묘지명(墓誌銘)」에 "온양지석암사(溫陽之石巖寺)" 등으로 기록하여 석암사와 봉곡사가 혼재되어 있어 이 시기 전후로 ‘봉곡사’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의 『조선지지자료』에 ‘봉곡사’로 기록하고 우리말로 ‘석암절’이라 한다고 하여 ‘봉곡사’라는 명칭이 공식화되어 있고, 주민들은 오랜 관행에 따라 석암절[석암사]로 부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봉곡사가 송악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봉곡사는 규모가 작은 사찰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사찰로서 법등이 이어져 왔다. 그 과정에서 봉곡사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과 불교 중흥에 기여한 근대의 큰스님인 만공(滿空)[1871~1946]의 일화가 알려져 있다. 정약용은 34세 때인 1795년(정조 19)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 밀입국 사건의 영향으로 7월에 충청남도 청양에 있는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어 5개월간 근무하였다. 정약용은 1795년 10월 26일부터 11월 5일까지 봉곡사에 열흘간 머물며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인 이삼환(李森煥)과 함께 봉곡사에서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 교정하였다. 그때 내포 지역 명문가의 자제들과 함께 문답한 내용으로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저술하였고, 당시 봉곡사에서 지은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만공은 23세 때인 1893년부터 2년 동안 봉곡사에 머물며 면벽수행을 하였는데, 1895년 7월 26일에 활연대오의 깨달음을 얻어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고 전한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빈 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 밖인데]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에서 건너왔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축시에는 닭이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뜨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봉곡사는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요사채·고방이 고건축물로 남아 있고, 근래에 건립한 향각전과 삼성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 입구의 둔덕에는 만공 스님의 친필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새겨 1993년에 건립한 만공탑이 있다. 2001년부터 최근까지 몇 차례의 보수 공사를 통한 정비가 이루어져 지금의 단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봉곡사에 오르는 우거진 소나무 숲길은 최근에 ‘천년의 숲길’로 명명한 아름다운 길이다. 길가의 소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송진을 채취하여 공출했던 상처와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관련 문화재]
봉곡사대웅전및고방은 1993년 7월 20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물로 17세기 봉곡사의 중수 과정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의 목조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기둥이 기울고 벽에 틈이 생기는 등 시급한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ㅁ’ 자형 요사채의 북쪽 모서리를 이루고 있는 고방(庫房)은 사찰의 여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건물이다. 내부는 2층 구조로 판벽과 판문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고방은 인근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에도 남아 있어 사찰 건축물의 지역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요사채의 전면은 불전으로 꾸며져 있으며, 내부에는 목조문수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문수보살좌상은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본래 보현보살좌상 1구와 함께 삼존불로 대웅전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관음보살도인 봉곡사불화 1점도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나 1985년에 도난당해 소재가 불명인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