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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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廉悌臣 |
이칭/별칭 | 개숙(愷叔),충경(忠敬),염불노(廉佛奴),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304년 - 염제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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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49년 - 염제신 찬성사(贊成事)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0년 - 염제신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354년 - 염제신 좌정승·우정승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6년 - 염제신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 임명.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겸직 |
활동 시기/일시 | 1358년 - 염제신 문하시중(門下侍中)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61년 - 염제신 관직과 명망이 최고위에 이르자 사직함. |
활동 시기/일시 | 1363년 - 염제신 우정승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64년 - 염제신 영도첨의사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65년 - 염제신 영삼사사·영문하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71년 - 염제신 서북면도통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382년 - 염제신 사망 |
사당|배향지 | 수현사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판미로 884[용수리 275-3번지]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서원 |
대표 관직 | 문하시중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입향한 서원 염씨의 중시조 .
[개설]
염제신(廉悌臣)[1304~1382]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고려에 돌아와서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오른 인물로 충청남도 보령에 입향한 서원 염씨의 중시조(中始祖)이다.
[가계]
본관은 서원(瑞原), 아명은 염불노(廉佛奴), 자는 개숙(愷叔)이다. 할아버지는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염승익(廉承益), 아버지는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 염세충(廉世忠)이다.
[활동 사항]
염제신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원나라에서 평장사(平章事)로 있던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원나라의 태정황제(泰定皇帝)를 시종해 총애를 받다가 고려에 들어와 어머니를 만나 보고, 다시 원나라에 건너가 상의사(尙衣使)가 되었다. 뒤에 다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귀국을 요청해 정동성낭중(征東省郎中)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염제신은 동료들의 횡포를 억제하는 한편, 토지와 노비의 소송은 모두 관계 당국에서 처리하도록 하여 충숙왕(忠肅王)[재위: 1313~1330; 1332~1339]의 신임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건너가서 익정사승(翊正司丞)이 되었다. 뒤이어 저장성[浙江省]에 나가 중정원(中政院)의 전화(錢貨)를 회계하게 되었다. 이때 관기들이 뇌물을 주어 매수하려 하는 것을 모두 물리쳤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원나라 순제(順帝)[재위: 1333~1368]가 특별히 등용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충목왕(忠穆王)[재위: 1344~1348] 때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수성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으로 봉해졌다. 뒤이어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가 되었고, 1349년(충정왕 1)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하정사(賀正使)[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는 사신]로 원나라에 갔다.
1354년(공민왕 3)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곧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에 봉해지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되었다. 그때 원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고려에 구원을 청하자, 유탁(柳濯) 등과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10월에 공민왕(恭愍王)[재위: 1351~1374]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1356년에 친원파(親元派) 기철(奇轍)[?~1356] 일당을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겸하였다. 1358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으며, 1361년에 관직과 명망이 최고위에 이르자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363년에 우정승이 되었으나, 홍건적의 난 때 어머니를 버리고 피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告身)[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에 서경(署經)[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의 제정 등에 있어 대간(臺諫)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되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1364년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가 되었을 때, 신돈(辛旽)[?~1371]과 마찰을 빚었으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다. 1371년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정벌할 때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이기고 돌아와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졌다. 그해 딸이 신비(愼妃)[고려 후기 제31대 공민왕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우왕(禑王)[재위: 1374~1388]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고, 곧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가 되었으며,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에 봉해졌다.
염제신의 8세손인 염경원(廉慶遠)이 충청남도 보령에 입향한 이래로 염제신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염씨는 삼한 시대에 중국 후당 때 건너와 경기도 파주에 터를 잡은 염형명을 시조로 하는데, 그 뿌리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고려 말의 염제신을 중시조로 한 것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염제신의 후손들이 충청남도 보령에 살면서 1921년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에 수현사(水絃祠)를 세우고 염제신의 영정을 봉안(奉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