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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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湖 |
이칭/별칭 | 수부(秀夫),충원(忠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이몽학의 난 진압과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조선 후기의 무신.
[개설]
최호(崔湖)[1536~1597]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앞장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충청수영 수군들을 이끌고 칠천량해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수부(秀夫)이다. 아버지는 벽동군수(碧潼郡守) 최한정(崔漢禎)이며, 어머니는 광주 김씨(光州 金氏)로 군수 김계옥(金繼玉)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576년(선조 9) 무과중시(武科重試)[현직 무관을 승진시키기 위하여 10년마다 전시(殿試)와 초시(初試)로 나누어 실시한 무과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94년에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야인들의 감파보(甘坡堡) 침입을 막지 못해 견책을 받았다. 1596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이몽학(李夢鶴)[?~1596]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홍가신(洪可臣)[1541~1615]과 함께 주장(主將)이 되어 보령현감, 남포현감 등과 함께 홍산(鴻山)·임천(林川) 등지에서 난적을 소탕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해전에서 원균(元均)[1540~1597]과 함께 패사(敗死)하였다. 비록 완패하였으나 칠천량해전에서 충청수군과 충청수사 최호는 나라를 지키는 임무에 충실하다가 남해 바다에서 전사하였다. 특히 육지에 내렸다가 도망가지 못하고 쫓아온 왜군의 칼을 맞아 전사한 원균과 달리 최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바다에 뛰어내려 죽음으로써 부하들과 함께 깨끗이 절의(節義)를 지키는 길을 택하였다.
[묘소]
최호의 묘소는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 발산리에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몽학의 난 평정에 세운 공로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고, 찬집청(撰集廳)의 주청으로 임난공신록에도 추록되었다. 시호는 충원(忠元)이다. 1729년 최호를 배향하는 사당 ‘충의사(忠義祠)’가 건립되었다. 1990년부터 군산문화원 주최로 ‘최호 장군 추모제’를 시행해 오고 있으며, 군산시가 새 충의사를 건립하여 사당, 내삼문, 유품전시관, 관리사를 둔 유적지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