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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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Samjagol|Samjagol Valley |
이칭/별칭 | 삼재골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수 |
전구간 | 삼자골 -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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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역 소재지 | 삼자골 -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 |
성격 | 골짜기 |
[정의]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 웃고얀[괴안동] 남쪽에 있던 골짜기.
[개설]
삼자골은 삼재골이라고도 하였다.
[명칭 유래]
최현수의 『부천사연구』1[1992]에는 삼자골에 대해 “윗괴안 남쪽에 있던 골짜기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괴안동을 예전에는 모두 고얀, 괴안으로 불렀고, 안곡로를 따라 유한대학교 쪽으로 지형에 따라 웃고얀[청암아파트 주변], 가운데고얀[대현, 현대아파트 주변], 아랫고얀[효창연립 주변]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윤재철은 『우리말 땅이름』[2019]에서 “괴(槐) 자는 옥편이나 사전에 회화나무[홰나무]와 느티나무 두 가지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느티나무로 인식하였다. 선비를 상징하는 나무이자 벼슬[입신출세]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이름난 양반 마을의 지킴이 나무로도 심었다.”라고 언급하였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누퇴나모’로 나오고,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느틔나모’로 나오는데, 늦게 움이 튼다는 뜻이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괴안리(槐安里)의 유래에 대해 “옛날 이 마을이 끝없이 느티나무가 무성하고 이 나무가 무성한 한 아늑하다 하여 괴안리로 칭하게 되었음”이라고 하였다. 느티나무의 상징성을 언급한 것이다.
양경직은 『부천문화』88호[2014]에서 “삼자골에는 미나리밭이 유명하였습니다. 여름이면 미나리가 삼자골을 뒤덮을 정도로 많았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백수현의 『부천시사』1[2002]에는 “삼(三)은 셋이라는 숫자를 한자로 쓴 것이다. 삼은 우리 민족의 숭배숫자로 무당이 가지고 있던 거울, 칼, 방울도 세 가지이고, [중략] 그래서 삼자골은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범박동 삼태봉에서 시작되는 골짜기라는 의미가 있다. 삼태봉은 아기의 탄생과 관련된 삼태기·삼태성을 가리키므로 이 삼자골도 숭배의 대상이 되는 골짜기로 자리매김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 옥산면 조의 산곡명(山谷名)에는 괴안리에 청어방곡(靑魚芳谷)이 조사되어 있고, 야평명(野坪名)에는 괴안리에 청등평(靑登坪)이 조사되어 있다. 그리고 옥산면의 천명(川名)에는 항동(航洞)에 용못내[龍池川, 룡못ᄂᆡ]이 조사되어 있다. 이건식은 「조선시대 부평부 동리촌명 후부 요소의 특징에 대하여」[2018]에서 “현(峴)이 ‘ᄌᆡ’와 ‘고ᄌᆡ’ 모두에 대응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ᄌᆡ’는 간혹 ‘ᄶᆡ’로도 표기한다. 또한 간혹 점(岾)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는데 점은 한국 고유 한자로 그 음이 재인데 우리말을 표기한 한자는 점(岾)에서 현(峴)으로 교체되었다고 하였다. 삼자골은 ‘삼ᄌᆡ골’이 변한 것으로 할미산의 줄기에서 뻗어 내린 웃고얀, 가운데고얀, 아랫고얀 등 세 고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ᄌᆡ’의 15세기 어형은 ‘자히·자ㅎ’이므로 ‘삼자골’은 오히려 ‘재’의 고형을 보존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자연환경]
할미산[노고산(老姑山)] 줄기가 괴안동에서 두 줄기로 나뉘어 용못내로 길게 뻗어 내리는데, 하나는 고얀마을이 형성된 청룡[양지초등학교에서 위로 길게 뻗은 구릉]이고, 하나는 건너편인 청등(靑嶝)인데 청등평은 가운데 고얀이 자리한 부안초등학교 앞 벌판이다.
[현황]
삼자골 양옆에는 청등들과 청어방골이 자리하고 있었다. 범박동에 신앙촌이 들어오기 전에는 삼자골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신앙촌이 들어오면서 할미산 자락, 수곡산[숙공산] 자락을 허물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삼자골도 훼손되었다. 그 후 역곡동에서 범박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뚫리면서 삼자골 골짜기가 메워졌다. 부안초등학교 앞 안곡로 건너편에는 현재 범박휴먼시아1단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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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2 | 삼자골 | <참고문헌> <문헌><저자>김기빈</저자>, <서명 검색어='한국의 지명 유래'>『한국의 지명유래』</서명>1~4(<출판사항>지식산업사, 1990~1997</출판사항>)</문헌> <문헌><저자>이민우</저자>, <서명 검색어='한국지명사전'>『한국지명사전 1993-1994』</서명>(<출판사항>한국교열기자회, 1993</출판사항>)</문헌> <문헌>한도훈,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부천문화원, 2001)</문헌> <문헌><서명 검색어='부천시사'>『부천시사』</서명>(<출판사항>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출판사항>)</문헌> |
2010.12.16 | 삼자골 | 1) <소표제>[명칭유래]</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삼자골'>삼자골</지명>에서 ‘골’은 골짜기를 가리키고, ‘자’는 산꼭대기라는 의미의 ‘잣’에서 ‘ㅅ’이 탈락해서 ‘자’가 되었다. 이것이 다시 재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재는 산이나 언덕을 가리키는 재[峴]로 쓰였다가, <지명 검색='0' 검색어=''>신라</지명> <인명 검색='1' UCI='G002+AKS-KHF_13ACBDB355C655D0765X0' 검색어='경덕왕'>경덕왕</인명> 이후 재가 들어간 땅이름은 성(城)으로 바뀌었다.</문단> -->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삼자골'>삼자골</지명>에서 ‘골’은 골짜기를 가리키고, ‘자’는 산꼭대기라는 의미의 ‘잣’에서 ‘ㅅ’이 탈락해서 ‘자’가 되었다. 이것이 다시 재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재는 산이나 언덕을 가리키는 재[峴]로 쓰였다가, <지명 검색='0' 검색어=''>신라</지명> <인명 검색='1' UCI='G002+AKS-KHF_13ACBDB355C655D0765X0' 검색어='경덕왕'>경덕왕</인명> 이후 재가 들어간 땅이름은 성(城)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산이나 언덕을 가리킨다. 삼자는 셋이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그렇기에 <지명 검색='0' 검색어=''>범박 현대홈타운</지명>은 자리에 있던 <지명 검색='1' 검색어='삼태봉'>삼태봉</지명>에서 출발한 골짜기라는 뜻이 된다.</문단> 2) <소표제>[자연환경]</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범박동'>범박동</지명>에 <지명 검색='1' 검색어='신앙촌'>신앙촌</지명>이 들어오기 전에는 <지명 검색='1' 검색어='삼자골'>삼자골</지명>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신앙촌'>신앙촌</지명>이 들어오면서 <지명 검색='1' 검색어='할미산'>할미산</지명> 자락, <지명 검색='1' 검색어='삼태봉'>삼태봉</지명> 자락, <지명 검색='1' 검색어='숙공산'>숙공산</지명> 자락을 허물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삼자골도 훼손이 되었다. 그 후 <지명 검색='1' 검색어='역곡동'>역곡동</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범박동'>범박동</지명>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뚫리면서 <지명 검색='1' 검색어='삼자골'>삼자골</지명> 골짜기가 메워졌다. 이 삼자골은 고랠이라 불리는 <지명 검색='0' 검색어=''>청어방곡</지명>과 연결되어 있었다.</문단> 3) <소표제>[현황]</소표제> <문단>세 개의 봉우리가 있던 <지명 검색='1' 검색어='범박동'>범박동</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삼태봉'>삼태봉</지명>에서 시작되는 골짜기로 지금은 <지명 검색='1' 검색어='범박동'>범박동</지명>으로 가는 길이 뚫려 있다. 위에는 밭농사를 짓고 아래로는 미나리꽝이 펼쳐져 있다.</문단> --> <문단>세 개의 봉우리가 있던 <지명 검색='1' 검색어='범박동'>범박동</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삼태봉'>삼태봉</지명>에서 시작되는 골짜기로 지금은 <지명 검색='1' 검색어='범박동'>범박동</지명>으로 가는 길이 뚫려 있다. <지명 검색='1' 검색어='삼자골'>삼자골</지명> 자체가 조금 가팔라서 다른 농작물은 심지 못하고 <지명 검색='1' 검색어='삼자골'>삼자골</지명> 아래에는 미나리광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문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