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844
한자 田錫圭
영어공식명칭 Jeon Seokkyu
이칭/별칭 사수(士受),한호(閒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안승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7년연표보기 - 전석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전석규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1년 - 전석규 석성향교 중건 착수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전석규 석성향교 재건
활동 시기/일시 1665년 - 전석규 통정대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전석규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전석규 가선대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69년연표보기 - 전석규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1년 7월 15일 - 전석규 교지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 보물 지정
출생지 석성현 -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석성현 -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성격 문인
성별 남성
본관 남양(南陽)
대표 관직|경력 통정대부|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정의]

조선 후기 부여 출신의 문인.

[가계]

전석규(田錫圭)[1577~1669]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사수(士受), 호는 한호(閒湖)이다. 아버지는 주부(主簿) 전탄(田坦)이다.

[활동 사항]

전석규는 1577년(선조 10) 석성현[현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에서 태어나 거주하였다. 석성현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의하여 석성향교가 불에 타는 난리를 겪었다. 당시 석성향교에서 수학 중이었던 전석규는 유생 이경술 등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향교의 대성전에 들어가 오성(五聖)과 제현(諸賢)의 위패를 가지고 나와 산 위로 옮겨 안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전석규는 석성 지역 사림들과 초가집 몇 칸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수십 년이 지나자 초가집이 무너지고 함몰되어 배향할 장소마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21년(광해군 13) 석성현감 윤겸선(尹兼善)이 향교를 중건할 뜻을 세우자 전석규이경술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였다. 1621년 착공을 시작한 석성향교는 착공 3년 만인 1623년(광해군 15)에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을 완공하였다.

석성향교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전석규는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성현(聖賢)들의 학풍(學風)과 학행(學行), 학덕(學德)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고 한호정사(閒湖精舍)를 세워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만년에 벼슬길에 올라 1665년(현종 6)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었고, 1666년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1669년(현종 10)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나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사계전서(沙溪全書)』 문인록에 전석규가 올라 있어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전석규에 관하여 전하는 문헌으로는 「석성향교 대성전 중수기」, 「석성 현학 명륜당 중수기」, 봉호사 게판문(蓬湖祠 揭版文)과 1899년(광무 3) 전석규를 비롯하여 석성향교의 중건을 이룩한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석성문행록(石城文行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전석규가 세상을 떠난 뒤 전석규의 학풍과 학덕을 우러르는 유림들이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전석규가 1669년 수직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을 때 붉은 관복과 옥관자를 하사받았고, 당시에 받은 교지들은 남양 전씨 6대에 걸친 왕지 및 교지, 호적 단자, 유서 등과 함께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南陽 田氏 宗中 文書 一括)’이라는 명칭으로 1981년 7월 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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