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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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湧泉寺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헐티로 1375-9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미경 |
건립 시기/일시 | 670년 - 용천사 옥천사로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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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267년 - 용천사 불일사로 개칭 |
중수|중창시기/일시 | 1267년 - 용천사 중창 |
중수|중창시기/일시 | 1631년 - 용천사 중창 |
중수|중창시기/일시 | 1805년 - 용천사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6년 7월 16일 - 용천사 대웅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95호에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3월 23일 - 용천사 동하 도로 수치 송공 표석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79호에 지정 |
현 소재지 | 용천사(湧泉寺) -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1062 |
성격 | 사찰 |
창건자 | 의상 대사(義湘 大師) |
전화 | 054-372-7204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소속 사찰.
[개설]
용천사(湧泉寺)는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절로 670년에 의상 대사가 옥천사(玉泉寺)로 창건한 해동 화엄 전교(海東 華嚴 傳敎)의 10대 사찰 중 한 곳이다. 1267년(고려 원종 8) 일연이 중창하여 불일사(佛日寺)라 칭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치고, 임진왜란 후 1631년(인조 9) 조영 대사(租英 大師)가 3중창하였으며, 1805년(순조 5) 의열이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湧泉)이라 붙인 것이라고 전한다. 이 용천의 샘물은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의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다고 한다.
유물로는 경내의 대웅전과 삼존불, 후불탱화, 나한 십육존불, 진영, 석조물 등이 있으며,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던 정료대가 남아 있다. 절 오른쪽 골짜기에는 고승들의 부도(浮屠) 6기가 이 절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용천사의 역사와 연혁에 대해서는 1702년(숙종 28) 김진규(金鎭圭)[1658∼1716]가 지은 목판본 사적기와 1703년 행규(行珪)가 지은『용천지(湧泉誌)』를 한데 엮어 1927년에 간행된 『청도군 각북면 용천사 사적(淸道郡 角北面 湧泉寺 事蹟)』이 참고가 된다.
이 중 김진규의 사적기에 따르면, 의상 대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670년(문무왕 10) 전국에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창건하였는데, 용천사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 의상 대사가 『화엄경』을 새긴 상아(象牙), 곧 「상간(象簡)」 8매로 불법을 전했는데, 나중에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려 목판으로 보충하였다. 또한 삼국시대에 관기(觀機), 도성(道成), 반사(搬師), 창사(瘡師), 도의(道義), 자양(子陽), 성범(成梵), 여백(女白), 우사(牛師) 등 이른바 구성(九聖)이 이곳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고려 시대에는 원종(元宗)[1260∼1263]대에 보각 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중수하면서 용천사(湧泉寺)라고 하였다가 다시 불일사(佛日寺)로 바꾸었다.
일연이 주지로 있을 때 원종이 경주로 행차하면서 불일사에 들렀는데, 원종은 일연을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일연이 지은 결사문(結社文)에 서명까지 하였다. 이로써 불일사가 더욱 유명해지고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천사 사적』에 수록된 김진규의 사적기와 행규의『용천지(湧泉誌)』에는 의상 대사의 창건과 일연 때의 중창 사실에 이어서 당대의 중건 사항이 매우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용천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당우가 소실되고 여러 성보를 약탈당하는 등 사세가 몹시 기울었다. 이후 1631년(인조 9) 조영(祖英)이 중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이어졌다. 불교 전성기에는 승려가 천여 명이나 되었고 주변의 암자들은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외 47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오랜 세월 속에 모두 없어져버렸다.
이미 24명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명의 도인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 중 3중창[1631] 때의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은 근대에 세워진 것이다.
근대에 와서는 절 살림이 몹시 어려워졌는데, 1907년 신도들이 모여 계를 만들어 법당을 중수하고 토지 9두(斗)도 구입하였다. 최근에는 1983년 범종각을 짓고, 우물인 용천각을 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활동 사항]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법회가 진행되고 신도회는 용천 신행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헐티재 너머에 위치한 용천사는 현재 승려 2명에 평신도 약 500여 명이 있다. 법회는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 법회로 진행되며 신도 활동으로 용천 신행회가 있다.
경내의 중심 전각은 대웅전이다. 그 왼쪽으로 응진전과 산신각, 요사와 우물이 위치하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주지실과 명부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씩의 규모로 맞배지붕 건물이다.
17∼18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좋은 자료로서 1996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되었다. 안에는 1633년으로 추정되는 목조 여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을 비롯하여 1956년에 조성한 칠성도와 신중도 및 의상 대사 진영이 있다.
대웅전 우측의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으로 최근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석조 석가여래 삼존상과 범석천상·제석천상 2구와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최근 지은 것이다. 내부에 봉안된 목조 지장 삼존상과 시왕상은 1669년에 조성된 것이다. 산신각은 맞배지붕에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씩으로 안에는 1956년에 조성한 산신도를 봉안하고 있다. 범종각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씩으로 1983년에 지었다. 안에는 1983년에 조성한 범종과 목어가 걸려 있다.
이 밖에 경내에는 상층 기단, 탑신 1개, 옥개석 2개만 남아 있는 석탑과 석등의 팔각 간주석,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던 정료대 등이 남아 있으며, 요사 뒤편 숲에 석종형 부도 6기가 세워져 있는데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78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용천사 앞 도로에서 청도 방면으로 아래로 내려가면 도로가 공터에 용천사 동하 도로 수치 유공 표석(湧泉寺 洞下 道路 修治 有功 表石)이 있다. 이 표석은 1725년(영조 1)에 세운 것으로 도로가 비좁고 험하여 사람뿐 아니라 우마(牛馬)도 다니기 힘들어 용천사의 승려들이 시주를 모으고 힘을 합해 도로를 넓히고 평평하게 닦았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79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련 문화재]
대웅전이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고, 용천사 동하 도로 수치 유공 표석(湧泉寺 洞下 道路 修治 有功 表石)이 현재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7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