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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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和楊氏 |
영어공식명칭 | Junghwa Y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지산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세욱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39년 - 양희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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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04년 - 양희지 사망 |
본관 | 중화 - 북한 황해북도 중화군 |
세거|집성지 | 지산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지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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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평양 - 북한 평양직할시 |
성씨 시조 | 양포 |
입향 시조 | 양희지 |
양포를 시조로 하고 양희지를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의 세거 성씨.
중화양씨(中和楊氏)의 시조는 고려 고종(高宗) 때 정승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당악군(唐岳君)에 책봉된 양포(楊浦)이다. ‘당악’은 중화의 옛 이름으로, 이후 후손들이 중화를 본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었다. 이후 양포의 6세손인 양백지(楊百枝)가 고려 말에 서경천호(西京千戶)를 지내며 평양에 자리 잡은 이래 후손들이 주로 평양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중화양씨의 대구 입향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입향조는 조선 전기 대사간을 지낸 양희지(楊熙止)[1439~1504]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 9년[1478년] 6월 5일 자 기사에 따르면 “홍문관부수찬 양희지가, 노모가 경상도 대구부에 있기 때문에 귀양(歸養)할 목적으로 상장(上狀)하여 사직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양희지는 40세 이전에 이미 대구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중화양씨 대구 입향조는 양희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양희지의 후손들은 수성구 지산동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였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중화양씨는 7,287명으로 조사되었다.
대구 지역 중화양씨 관련 유적으로는 수성구 파동에 오천서원(梧川書院)이 있고, 오천서원 아래에 양세흥(楊世興)을 모시는 무릉재(武陵齋)가 있다. 또 황금동에는 양달화(楊達和)[1694~1756]를 추모하는 영모재(永慕齋)가 있고, 지산동에는 학산재(鶴山齋)가 있다. 이 밖에도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에는 양선화(楊善和)를 추모하는 원모재(遠慕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