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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헌 김성노 선생의 학덕과 유림계 향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A010104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정의]

야헌 김성노 선생의 학덕과 유림계 향사

[입향조 10세손인 야헌 선생]

유학자이자 선비로 이름난 김성노(金成魯, 1769-1831) 선생은 다리목 마을 입향조 김유원(金有元) 공의 10세손이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사람으로 일찍 학문에 뜻을 두고 향시에도 세 번씩이나 합격하였다. 하지만 난세의 정치무대에 나아가기보다는 다리목 마을 금계산(金鷄山) 자락에다 ‘낙교재(洛橋齋)’라는 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높은 학식으로 향리 일원에서 문하생들이 몰려들어 그 수가 100여 명을 넘었다. ‘팔문장(八文章) 배출’이라는 말처럼, 문하생 중에는 진사(進士) 합격자를 비롯하여 학식이 뛰어난 이도 적지 않았다. 선생의 사후 문하생들은 유림계(儒林契)를 조직하여 선생의 학덕을 기렸다. 선생의 추모 제향(祭享)은 발기인의 증손 대에 이르기까지 대(代)를 이어가며 계속되었다.

이후 시대 변천에 따라 유림계가 산일되자, 이번에는 후손들이 나서서 ‘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野軒 處士 遺蹟 保存會)’를 결성하여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있다. 2001년 4월 건립된 ‘야헌 처사 청도 김공 유적비(野軒 處士 靑道 金公 遺蹟碑)’ 비문을 중심으로 선생의 학덕과 추모 제향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다음과 같다.

[‘야헌’은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

낙교재의 명칭은 ‘낙동강 남쪽 교항(다리목) 마을 서재’란 뜻이다. 서기 1800년대까지 이 고을에는 글을 배울 서당이 없었다. 그러하여 다리목 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대구 연암골의 이름 높은 학자 서용담(徐龍潭)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재주가 뛰어나 20여 세에 이미 선비가 되었다.

과거에도 오를 수 있는 학력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풍조에서 과거 급제만이 최고의 능사이고 글을 배운 보람이라 여겼지만, 선생은 남다른 작심을 가지고 주위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친 채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자신이 거처할 방문 위에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의 ‘야헌(野軒)’이라는 두 글자를 써 붙이고 이 자리를 터 잡아 담을 짓고 마을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배우기에 힘쓰도록 한 것이다. 성인 후진들에게는 행신범절(行身凡節)을 깨우치기에 몸소 본보기가 되어서 더 높은 선비정신을 발휘하였다.

[문하생들의 유림계와 야헌 선생 향사]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마을 풍습이 날로 눈에 띄게 새롭게 변해갔다. 드디어 문하생 중에는 진사 급제자도 배출되었다. 이런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 과거장에 나들던 100여 명의 문하생들이 사방에서 책을 메고 낙교재로 몰려들었다.

문하생 중에는 스스로 훈장(訓長)이 되어 선생의 선비정신과 학문을 널리 이어나갔다. 선생 사후 문하생들은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계(儒林契)를 조직하여 기금을 모으고 매년 음력 3월 10일을 기해 추모 향사를 지내왔다. 1852년 세운 선생의 묘비에 기록된 ‘야헌 처사 묘갈명(野軒 處士 墓碣銘)’에는 유림계에 17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비문의 문인(文人) 명단에는 당시 생존자와 고인이 혼재되어 있어 선생의 문하생을 비롯한 뜻을 같이 하는 분이나 직계 자손들이 참여하였다.

“낙교재 유림의 역사를 이야기할라 치면, 철종 대부터 17명의 제자들이 선생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유림계를 모아가지고 이 지역에서 최고로 높으셨던 선생의 이름을 이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매년 추모제를 지냈지요. 처음에는 돈을 내어 가지고 논을 2마지기 구입해서 거기서 나오는 재물로 모셨지요. 그 향사가 이들의 증손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갔어요.”(김0린)

1907년 간행된 「야헌실기(野軒實記)」에는 유림계에 참여한 19명의 문하생들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이 중 김철구(金喆龜), 김주헌(金周憲), 김종한(金宗漢), 김종원(金宗遠), 김긍렬(金兢烈) 등 5명은 청도 김씨 후손들이다.

[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 결성과 추모 제향]

유림계가 4대까지 내려오면서 새로운 후학들이 계속 배출되고 이들도 자연적으로 가입하여 100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1940년대까지 학교제도가 설치된 이후에도 이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인륜도덕을 터득하여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한 인사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후 시대 변천에 따라 전통의 가치가 약화되고 인구 이동이 커짐에 따라 선생의 추모 향사는 차츰 빛바래고 말았다. 선생의 직손(直孫)도 타향으로 떠나고 행방조차 묘연한 상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이 남긴 저술서인 『전유실기(篆有實記)』를 비롯한 관련 자료들도 소실되었다.

이에 선생의 방손(傍孫)들이 2001년 ‘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를 결성하고 향사를 복원하였다. 낙교재 뒤편에는 ‘야헌 처사 청도 김공 유적비’를 세우고 선생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드높은 선비정신 어두움속 등불되어 / 오랜세월 허무런고장 새삶의 길밝혔네 / 거룩할손 공의얼 천추에 기리고저.’ 선생의 유적비 건립에 대한 청도 김씨 종인들의 마음을 나타낸다.

[참고 문헌]

『大邱邑誌』

『野軒實記』

『野軒 處士 成魯 墓碣名 幷序』

김만채,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참고록』(2016)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회, 『略史記』(2008)

[정보 제공자]

김0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김0옥(남, 1942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강림리 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 회장)

김0채(남, 1948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강림리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회 회장)

김0구(남, 195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서구 장기동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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