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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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應洙 |
영어공식명칭 | Min Eungsu |
이칭/별칭 | 성보(聲甫),오헌(梧軒),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병호 |
출생 시기/일시 | 168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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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10년 - 민응수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민응수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34년 - 민응수 대사성·대사헌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35년 - 민응수 경상도관찰사 부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35년 - 민응수 토성인 대구읍성을 석성으로 개축 |
활동 시기/일시 | 1737년 - 민응수 경상도관찰사 이임 |
활동 시기/일시 | 1740년 - 민응수 이조판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46년 - 민응수 우의정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750년![]() |
출생지 | 여흥 - 경기도 여주시 |
거주|이주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부임|활동지 |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묘소|단소 | 민응수 묘소 - 경기도 여주시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여흥(驪興) |
대표 관직 | 경상도관찰사|우의정 |
조선 후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관.
민응수(閔應洙)[1684~1750]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성보(聲甫), 호는 오헌(梧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안변부사 민광훈(閔光勳)이고, 할아버지는 형조참판 민시중(閔蓍重)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민진주(閔鎭周)이며, 어머니는 정상징(鄭尙徵)의 딸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부인은 형조참판 조태동(趙泰東)의 딸 양주조씨(楊州趙氏)이며,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민응수는 1684년(숙종 10) 여흥(驪興)[현 경기도 여주시]에서 태어났다. 171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25년(영조 1)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파직되었다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워 동래부사가 되었다. 그 뒤 충청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대사간·형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3년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734년 대사성·대사헌이 되었다.
민응수는 1735년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하여 대구읍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빈민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승려들에게도 후한 배려를 하여 승려들이 세운 비석이 경상감영 공원 내에 남아 있다.
민응수는 1737년 경상도관찰사 임기를 마친 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당론(黨論)을 제기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738년 다시 등용되어 평안도관찰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예조판서·판의금부사·형조판서를 거쳐 1746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이후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의 관작 추탈을 상소하다 면직되었고, 1750년 사망하였다.
민응수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민응수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민응수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경상도 승려들이 감사의 뜻으로 세운 「관찰사 민상국 휘 응수 무휼 승도비(觀察使閔相國諱應洙撫恤僧徒碑)」가 1932년 경상감영공원 안으로 옮겨져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