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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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孫- 希望- 歷史觀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개설]
대구 2·28기념중앙공원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기 전까지는 잊을 수도, 죽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여전히 맨발의 소녀상처럼 차가운 현실을 딛고 있다.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홈페이지 http://museum.1945815.or.kr는 박물관을 의미하는 museum 다음에 해방된 날짜를 의미하는 1945815로 이루어져 있다.
[할머니가 된 소녀들]
평범한 할머니로 살고 싶어도 끔찍하였던 소녀 시절을 계속 떠올려 말하여야 하고, 소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버렸다. 소녀로 살아야 할 시기를 빼앗긴 채로, 소녀 때 받은 상처를 씻지 못한 채로 할머니가 되어 버린 소녀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라 불리고 있다. 1991년 이후 30년 동안 끊임없이 진행된 위안부 운동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1991년 8월 14일 오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김학순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던 피해자임을 폭로하였다. 김학순의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는 비로소 실체를 가진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해마다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김학순 할머니 이전에도 ‘위안부’ 피해자 폭로는 있었으나 다만 국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귀국하지 못한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이었다. 1914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배봉기 할머니는 만 29세이던 1943년에 위안부에 ‘공출’되었다. 배봉기 할머니는 “남쪽 섬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바나나가 떨어져 입에 들어온다.”는 말에 속아 오키나와에 있는 위안소로 향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였던 배봉기 할머니는 1975년 일본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 일본 언론을 통하여 위안부임을 한국인 최초로 증언했다. 하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잊혀졌으며 국내에 위안부 피해 등록을 하지 못하고 1991년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김학순 할머니가 있기까지 여성운동에는 많은 변화가 있어 왔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끌려간 기억을 통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 윤정옥 등은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하였다. 그때까지 일본 정부는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드디어 김학순이 스스로 ‘위안부’의 피해자였음을 폭로하고 최초로 대중 앞에 나선 것이다. 반세기 넘게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위안부’ 피해를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일본의 사실 인정과 공식 사죄를 주장한 김학순은 그 후 수백 명의 김학순을 소환하며 착취 당한 식민지 여성의 인권을 대변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같은 ‘위안부’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200명 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였다. 또, 피해자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직접적 개입을 보여 주는 많은 증거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대구에서 나고 자란 소녀들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음을 고백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구 평화의 소녀, 이용수 할머니와 김순악 할머니]
1928년 대구 출생으로 가난한 육남매 집에서 자란 이용수 할머니는 만 16세에 ‘잘 살게 해준다’,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친구 어머니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국민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를 따라나섰다. 대만 신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였고, 1945년 귀국할 수 있었다. 대구 등지에서 술집 종업원, 포장마차, 보험판매원 등을 하며 홀로 생활하다가 1992년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한 뒤 국내외를 누비며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94년 일본 방문을 시작으로 국내외 증언활동을 펼쳤으며 2000년에는 미국 하원 청문회 증언을 하여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2012년 19대 국회 비례대표 출마선언을 한 바 있으며 20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시의회 증언과 더불어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주도하였다. 2020년 정의기억연대를 공개 비판하였다. 이용수 할머니가 머무는 대구·경북 지역은 시민모임이 활발한 곳이라 위안부 문제에 더욱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와 나이가 같고, 아픔이 같고, 고향이 같아 가깝게 지내던 김순악 할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28년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한 김순악 할머니는 삼남매의 첫째로 외동딸이었다. 실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만 15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중국 치치하루의 군 위안소라는 지옥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일본 패망 후 열여덟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스스로 ‘이미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여 서울, 군산, 여수 등에서 유곽 생활을 하였다. 이후 기지촌 종업원, 외제 판매, 술장사, 밥장사, 식모살이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아들 두 명을 뒀지만, 남편은 없었고 가족에 대한 언급도 꺼렸다. 피해자 상당수가 1990년대 초 피해 신고를 한 것과 달리 2000년에야 피해 신고를 하였다. 2000년 1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지정되었다. 우울증과 화병으로 술과 담배, 다툼으로 점철된 김순악 할머니의 삶은 2000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지원 대상이 되면서 달라졌다. 김순악 할머니는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보고 또 보았다. 그것은 나라에서 ‘위안부’ 피해자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준 것 같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용수 할머니 등과 수요집회에 참여하며 일본 정부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 원고로 증언하였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미국 LA 세계대회’에서 일본 정부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2010년 1월 “내가 죽어도 내게 일어났던 일은 잊지 말아 달라”고 유언하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위하여 5400여만 원을 남겼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김순악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영화 「보드랍게」는 할머니가 그동안 들어온 호칭들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이 다양한 호칭들은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을 전해준다. 김순악 할머니는 평소 부처님께 절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꽃그림을 잘 그렸으며 춤추고 노래도 잘하는 우리 곁의 고운 할머니였다. 생전에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할머니가 3년에 걸쳐 진술한 아픈 과거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책으로 엮었다. 당시 생존 위안부 할머니의 생애를 기록한 첫 번째 책이다. 출판 비용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누리꾼 488명이 나흘 만에 300만 원을 모아 마련하였다. 출판기념회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의 문화웨딩홀에서 열렸다.
2010년 1월,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김순악 할머니의 유언 “내가 죽어도 내게 일어났던 일을 잊지 말아 달라”라는 말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또한 김순악 할머니가 남긴 5400여만 원의 돈을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하는 기초로 삼게 되었다. 2011년에는 김순악·심달연 할머니의 원예 압화작품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희움’이라는 브랜드도 만들었다. 수익금은 전액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쓰이도록 했다. 고려대 사회적기업 동아리 블루밍팀에서 희움 제품의 판매와 홍보를 도왔고, 희움의 ‘의식팔찌’가 화제가 되며 입소문을 탔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위안부 의식팔찌’를 착용한 모습이 포착되면서 팬들과 네티즌들 사이에서 ‘의식팔찌’가 관심을 끈 것이다. 역사관 건립비 12억 5000여만 원 중 절반이 넘는 7억 원이 희움 판매 수익금으로 마련되었다.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일에 사람들의 뜻이 모여들면서, 시민모임의 노력과 다양한 시민들의 성원으로 역사관 건립이 추진되었고, 여성가족부와 대구광역시, 대구광역시 중구도 지원에 동참하여 2015년 12월 5일,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 개관하였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2015년말,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의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개관식에는 시민 200여 명과 이용수 할머니 등 대구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4명이 역사관 개관을 축하하러 모였다. 대구광역시의 중심가인 동성로에서 10분 정도 걷다 보면 근대 골목이 나온다. 1920년대 번화가였던 북성로의 대구 근대 역사관을 지나면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일본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경기도 광주시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부산광역시 수영구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 서울특별시의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문을 연 위안부 역사관이다. 희움 역사관은 1926년 경일은행 자본으로 지어졌던 2층 목조건물을 뼈대는 남기되 내부를 개조하여 만들었다. 역사관은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주도하여 건립하였다. 사업비 13억 4000만 원 중 대구시와 여성가족부는 2억 원을 지원하였고 나머지는 시민 모금으로 충당하였다. 역사관 전시실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사,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약력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1은 우리나라 위안부 역사를 연대별로 전시하고 있는데, 위안부 관련 사실과 동원된 피해 여성들의 사례를 버마 전선에 동원되었던 문옥주 할머니 등 대구·경북 피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영상실에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6인의 증언을 시청할 수 있다. 대상은 대구·경북 피해 여성들이며 한국어와 영어로 21분간 제공하고 있다. 벙커는 희움 역사관 재건축 당시 발견된 지하 벙커로 지역 작가 혹은 젊은 작가가 평화의 메시지를 세기고 장소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2층으로 이동하는 계단은 ‘갤러리 평화’이다. 피해 할머니들의 심리치료를 위하여 실시하였던 원예 압화작품을 전시하였다. 1층 전시실의 주제는 위안부, 2층 전시실의 주제는 시민모임의 활동 결과이다. 또한 교육관은 대구·경북 피해 할머니들의 사진과 유품 전시, 그리고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설치된 태블릿 피시를 통하여 전시되지 않은 피해 할머니들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Blooming their hopes with you[그들의 희망을 당신과 꽃피움]”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의식팔찌’는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브랜드인 ‘희움’에서 판매된다. ‘희움’은 2012년 3월 고려대 학생들로 구성된 블루밍팀이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협력하여 만든 윤리적 소비 브랜드이다. 브랜드 이름은 팔찌에 적힌 문구 그대로 ‘희망을 꽃 피움’의 줄임말이다. 희움의 수익금은 모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하여 사용된다. 팔찌 이외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직접 만든 압화 가방 등도 판매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미술심리치료 중 하나로 꽃이나 잎을 종이에 대고 누르는 압화작품을 만들어 왔다. 이 압화를 이용하여 만든 가방이 압화가방이다.
희움 역사관의 소장 기록물은 역사관 개관 2년 전부터 시민모임이 수집하여 소장한 기록물을 경북대학교 대학원 기록학과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정리하였다. 역사관은 개관일[2015년 12월] 기준으로 위안부 관련 서적 328권, 연속간행물 89권, 시민활동 기 록물 852건, 곽병원 문서 15건, 녹음·영상자료 DVD 1건, 피해자 유품 662건 등 1,949점의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다. 시민모임의 수집 기록물은 2014년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대구에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의료지원을 실시하였던 곽병원 진료차트는 피해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 기록군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역사관을 품은 대구 중구의 근대골목]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정치·경제 중심지였던 서문로에 있다. 서문로는 북성로와 함께 대구에서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거리로, 희움역사관 또한 90여 년이 넘은 일본식 2층 목조 건물을 재건축한 것이다. 희움역사관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공간의 재건축을 통하여 고통스러운 과거를 덮기보다는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직시하여 역사적 교훈을 얻고, 이를 기억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자 조성되었다.
대구광역시 중구에는 조선시대 이후 성곽 주변과, 경상감영, 서문시장과 함께 근현대 건축물의 자취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그 활용 방향에 대한 고민과 시도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00년대 초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의 대구문화지도 제작 이래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지속적인 민관 협력 작업을 통하여 근대문화골목 공공디자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2007년 근대골목 디자인 개선사업, 2009년 종로 진골목 개선사업, 2011년 북·서성로 근대건축물 리노베이션 사업을 통하여 대구의 낡고 오래된 골목과 건물들이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공간으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근대골목투어의 주요 코스는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내 선교사 주택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와 근대 시기의 건축물을 활용한 판 게스트하우스,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대구근대역사관을 답사한 후, 경상감영공원, 수제화 골목, 1960년대 건축물을 리노베이션한 대구 ‘하루’ 일본인 방문자센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구의 근대골목과 관련된 사업들은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었고, 2013년에는 지역 문화브랜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성공적인 도심 재생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관광 가치 증진을 성취한 사례로 평가를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