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310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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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劉漢良 |
영어공식명칭 | Yu Hallyang |
이칭/별칭 | 충겸(忠謙),은재(隱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렬 |
활동 시기/일시 | 1570년 11월 - 유한량 무장현감 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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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1년 11월 - 유한량 무장현감에서 탄핵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유한량 장윤 의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593년 - 유한량 사망 |
부임|활동지 | 무장현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
사당|배향지 | 조산사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산72 |
사당|배향지 | 덕산단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강남리 |
사당|배향지 | 송계사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오월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강릉 |
대표 관직 | 무장현감 |
[정의]
조선 전기 무장현감을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강릉(江陵). 증조할아버지는 조선개국공신인 유창(劉敞)이며, 아버지는 강릉 유씨 좌랑공파 파조인 유계주(劉繼周)이다. 아들은 진원현령(珍原縣令)을 역임한 유세분(劉世扮)이다.
[활동 사항]
유한량(劉漢良)은 효행과 덕행으로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제수하여 1570년(선조 3) 11월부터 1571년 11월까지 무장현에서 근무하였다. 무장현감 재직 시 행정을 간단명료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며, 정사를 올곧고 깨끗하게 하여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무장현 아전들이 현감을 속여 간교한 짓을 하자 그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게 되어 탄핵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한량은 창의하여 곡식을 모았으며,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이 진주성을 방어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으로 참여하였다. 해미현감 정명세(鄭名世)와 거제현감 김준민(金俊民) 등과 함께 좌의부장(左義部將) 장윤(張潤)의 의진에 들어갔다. 이후 장윤은 순천을 지키는 전라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 의진에 들어가 활동하였는데, 왜군이 다시 진주성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임계영에게 청하여 유한량 등과 함께 300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함께 들어갔다. 1593년(선조 26) 6월 29일 황진을 대신하여 장윤이 순성장의 직임을 맡았다. 이날 왜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하다가 진주성의 서문이 함락되자 유한량은 창의사 김천일 및 여러 의병장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강릉 유씨 후손들은 유한량이 무장현감으로 재임한 이후 고창 지역에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유한량은 진주성에서 순국한 후 도정(都正)을 증직받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조산사(造山祠),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강남리에 있는 덕산단(德山壇),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오월리에 있는 송계사(松溪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