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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943
한자 文相直
영어음역 Mun Sangjik
이칭/별칭 문백(文白),김춘배(金春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지도보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성별
생년 1893년연표보기
대표경력 ㄱ당 연구부원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문상직(文相直)[1893~]은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문상직은 스무 살 즈음, 서울에서 약 1년간 학문에 전념하다가 곧 만주로 건너가서 통화현(通化縣)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에는 중국 난징[南京]과 만주 안동(安東)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만주 안동에서 고령 출신인 박광(朴洸)이 운영하는 곡물 무역상 신동상회(信東商會)에서 근무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신원인 황대벽(黃大闢)으로부터 국내에 발표할 선포문(宣布文)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綱領) 등 각종 인쇄물 50여 장을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919년 4월 13일, 이들 서류를 과자 상자 속에 숨겨 신의주를 거쳐 서울에 들어와 김상용(金尙容)에게 선포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 40장을 넘기고, 이튿날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외교부장인 서상일(徐相日)에게 나머지 10장을 전달하고 반포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황대벽에게서 고유문(告諭文), 『독립신문(獨立新聞)』,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원개조서(閣員改造書) 등 300여 장을 받아 송재기(宋載基)에게 주어 전국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1919년 8월, 신흥무관학교 군사과 졸업생의 모임인 학우단(學友團)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김노원(金魯元)·김용만(金用萬)·이순원(李淳元) 등과 함께 국내 관공서와 한인 관리, 일본인 고위 관리에 대한 폭탄 테러를 논의하였다. 이때 국내 정찰과 자금 조달을 맡았다. 이를 위해 9월 11일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와 대구에서 서영균(徐榮均), 송정득(宋貞得), 김근(金根), 홍간제(洪干濟) 등을 포섭하여 거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920년 1월 26일 거사를 위해 폭탄을 들여오도록 홍간제를 만주에 보내고 자신도 만주로 가려던 중 경상북도 경찰부에 검거되어 같은 해 7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大正8年制令)」 제7호와 「총포화약류취제시행규칙」 위반, 경상북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4년 14일 만에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독립운동 혐의로 1929년 옥고를 치렀다.

1928년 4월 하순경에는 대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노차용(盧且用), 장택원(張澤遠), 정태봉(鄭太鳳) 등과 함께 신간회 등 기존의 민족 운동 진영의 소극적인 활동을 지적하며 적극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5월 초순경 이강희(李康熙), 유상묵(柳尙默)이 가세하여 비밀결사 ㄱ당(黨)이 조직되었다. 5월 20일 오후, 대구 달성공원에서 당 창설과 함께 목적·강령·임원 등을 결의하였는데, 문상직은 연구부 직책을 맡았다. 그해 6월 재무부를 담당한 노차용, 장택원 등이 달성군의 부호 김교식(金敎式)을 위협한 사실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6월 17일 체포되었고, 문상직은 7월 24일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경상북도 경찰부, 1934)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 『고령군지』 (고령군지편찬위원회, 1996)
  • 「판결문번호 미기재(19200604, 문상직)」(대구지방법원, 1920. 6. 4)
  • 「판결문번호 미기재(19200710, 문상직)」(대구지방법원, 1920. 7. 10)
  • 「판결문번호 소화4년형공공제42호」(대구복심법원, 1929.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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