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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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개실마을에 입향(入鄕)하다]
김종직 선생은 62세이던 1492년(성종 23) 8월 19일 밀양에서 별세했다.
사림파에서는 ‘도덕박문왈문 염방공정왈충(道德博聞曰文 廉方公正曰忠)’의 뜻을 따라 문충(文忠)으로 시호를 삼자고 했으나 훈구파에서는 ‘박문다견왈문 거경행간왈간(博文多見曰文 居敬行簡曰簡)’의 ‘문간(文簡)’을 주장하였다. 결국 훈구파의 주장에 따라 문간으로 시호가 결정되었다. 사림파와 훈구파가 첨예하게 대결했던 당시의 사정이 시호가 내려지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후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종직은 대역죄로 부관(副棺)되었으며, 집안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때 정부인(貞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전라도의 운봉현으로 보내지고 아들인 김숭년(金崇年)은 13세의 어린 나이 때문에 외가인 합천 야로의 행정리로 보내져 멸문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뒤 1507년(중종 2) 중종반정으로 김종직은 신원이 회복되어 벼슬과 시호가 되돌려지고 재산도 환급되었다.
더불어 자손들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게 되어 김숭년은 밀양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557년(명종 12) 김종직의 손자인 김유(金紐) 때 거주지를 다시 합천 행정리로 옮겼다.
하지만 김유는 다시 고령의 쌍림면 하거리 일대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는 김유가 고령의 양천최씨(陽川崔氏)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김몽령(金夢齡)과 김성율(金聲律) 대를 거치면서 김종직의 후손들은 잠시 쌍림면 송림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김성율은 고령박씨(高靈朴氏)와 혼인하여 그 재산을 상속받기도 하였다.
이후 김종직의 5세손인 김수휘(金受徽) 때인 1651년(효종 2) 현재의 개실마을[佳谷]로 입향하게 된다.
김수휘는 처음 개실마을의 동북편 산 아래 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재 마을 주민들이 ‘문터’ 혹은 ‘무근터’라고 부르는 곳으로 도로를 따라 개실마을로 접어드는 초입이다. 하지만 김수휘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현재의 점필재 종택이 있는 곳으로 위치를 옮겼다. 이때부터 김종직 가문의 개실마을에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김종직의 후손들이 개실마을에 정착한 후인 1689년(숙종 15) 정월에 7세손인 김시락(金是洛)의 진정으로 김종직은 영의정으로 증직되었고, 1708년(숙종 34) 9월에는 문간에서 문충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현전하는 교지에는 1709년(숙종 35) 2월에 시호가 내려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사이 김숭년이 집경전참봉, 김몽령이 호조정랑, 김성율이 수군만호, 김수휘가 부사용, 김시락이 헌릉참봉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에는 영남 지역의 남인(南人)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김종직 가문도 관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개실마을은 종택을 중심으로 김종직의 선비 정신과 학문을 계승하면서 면면히 전통을 계승해 왔다.
“산부재고 유선즉명, 수불재심 유룡즉영(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즉 “비록 산이 높지는 않더라도 신선이 살면 명산(名山)이 되는 것이요,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스러운 영천(霙川)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개실마을은 높은 산과 신령스러운 내가 없더라도, 김종직이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화개산이 돋보이고 내가 신령스러워질 수 있었으며, 조선 도학의 연수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직 가문과 고령 지역의 인연]
개실마을에 김종직의 후손들이 세거한 것은 17세기 중반인 1651년경이었다. 하지만 이들 가문과 고령 지역이 인연을 맺은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즉, 김종직 선생의 아버지인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1389~1456]가 조선 전기 고령현감으로 부임했던 것이다. 김숙자는 1442년(세종 24) 11월부터 1447년(세종 29) 11월까지 고령현감으로 재임하였다.
그는 5년간 고령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김종직이 찬한 「이존록(彛尊錄)」에 김숙자가 선정을 베푼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고령과 성주 지역을 흐르는 가야천(伽倻川)[현 대가천]에서 나는 은어((銀魚)는 중앙에 진상하는 특산품이었다. 그런데 성주 사람들이 진상을 핑계로 해마다 고령 땅까지 들어와 불법으로 은어를 잡고, 고령 사람들에게 강제로 밥을 짓게 하고 닭고기와 채소를 공급케 하여 피해가 컸다. 이전의 현감들은 모두 그것을 금지하지 못하고 묵인해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는데, 김숙자는 사람을 보내 그물을 빼앗고 은어를 잡던 관리들을 매질하여 고령 밖으로 쫓아 버렸다. 그러자 성주목사가 이 사건으로 인해 진상을 못하게 되었으니 고령에서 다시 은어를 잡을 수 있도록 시정해 달라고 경상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김숙자는 감사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밝히고, 성주가 고령보다 은어를 잡을 수 있는 구역이 더 넓으며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고 있다고 당시의 사정을 상세히 밝혔다. 결국 성주목사가 고령에 피해를 입힌 사실을 사과함으로써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또 고령에서는 매년 백자기(白磁器)를 공물로 진상했는데, 자기를 생산하던 공인(工人)들의 솜씨가 매우 거칠어서 매년 중앙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또 진공할 때마다 경기도 광주(廣州)나 전라도 남원(南原)은 상을 받았으나, 고령의 공인들은 죄를 받기도 하였다. 김숙자는 현감으로 부임한 후 공인들을 훈시하고 아홉 번 채질하는 방법을 가르쳐 자기 생산 과정을 개선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고령의 자기가 매우 정치하고 깨끗하게 되어 경기도 광주나 전라도 남원의 것보다 더 우수하게 되었다. 그 후 고령의 공인들은 매번 상을 받고, 오히려 광주나 남원의 공인들은 질책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世宗實錄地理志)』에는 고령 지역이 최상품의 자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현재 고령 지역에는 성산 기산동 도요지와 사부동 도요지가 각각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그 외에도 수백여 기의 도요지가 분포하고 있다. 조선 시대 고령의 자기가 전국 최고의 품질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은 김숙자의 은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개실마을 인근에도 다수의 자기 요지가 분포하고 있는데, 어쩌면 김숙자가 이곳 도요지의 공인들에게도 기술을 전했는지 모른다.
김종직은 고령현감으로 재임하던 아버지를 따라 현청에 머물면서 유학을 공부하였다. 『점필재집』의 「연보」에 따르면 김종직은 13세 때인 1443년(세종 25) 여름에 작은형인 김종유(金宗裕)와 함께 『주역(周易)』을 배웠다.
이처럼 아버지 김숙자는 고령현감으로 5년간 고령에서 재임하였고, 그 아들 김종직은 고령에서 『주역』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 뒤로도 김종직은 고령 출신의 사림파 인사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처럼 김숙자·김종직 부자가 고령과 인연을 맺은 지 200여 년 후 김종직의 후손들이 개실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김종직의 후손들이 고령으로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인연의 끈은 개실마을의 김종직 후손들에 의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