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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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昌洞甕棺墓址 |
영어공식명칭 | Jar Burial in Sinchang-dong |
이칭/별칭 | 광주 신창동 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512-1 |
시대 | 선사/철기 |
집필자 | 김정애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3년 4월 10일~4월 23일 - 광주 신창동 유적 서울대학교에서 발굴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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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10월 23일~12월 12일 - 광주 신창동 유적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2년 9월 9일 - 광주 신창동 유적 사적 제375호 지정 |
성격 | 고분 |
양식 | 독무덤|널무덤 |
크기(높이,지름) | 2002년 조사된 대표 독무덤: 69㎝[전체 길이]|47㎝[대옹 길이]|30㎝[대옹 너비]|22㎝[소옹 길이]|20㎝[소옹 너비]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제375호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철기시대 옹관묘[독무덤]와 토광묘[널무덤].
[위치]
신창동 옹관묘지가 발굴된 광주 신창동 유적은 영산강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흘러가 반원형으로 곡류하는 지점에 있다. 동쪽은 넓은 충적평야 지대이고, 서쪽은 높이 50m 내외의 낮은 구릉지이다. 신창동 옹관묘지가 있는 지점은 신창제와 인접한 서쪽 구릉지 말단부이며, 높이 35m 내외에 해당한다. 주변 일대는 민묘(民墓) 조성과 개간으로 인해 원래 지형이 파괴되었으며, 북동쪽으로 호남고속도로와 국도가 부설되고, 서쪽으로는 택지가 조성되어 원래 지형이 확인되지 않는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신창동 옹관묘지는 1960년 향토사학자 양회채에 의해 독무덤이 발견되면서 처음 알려졌다. 1963년 서울대학교에서 광주 신창동 유적을 발굴 조사한 결과 독무덤 53기가 확인되었다. 그 후 신창동 일대에 대한 조사가 연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992년도 조사에서 광주 신창동 유적의 학술적,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사적 제375호로 지정되었다.
연차 조사 중 2002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신창동 옹관묘지에 대한 학술 조사를 실시하였다. 학술 조사의 목적은 옹관묘군 일대의 독무덤 및 다른 묘제의 존재 여부와 그 범위를 밝히고 종합적인 성격 파악을 위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 철기시대 독무덤 3기와 널무덤 1기, 고려시대 집터 1기가 확인되었다.
[형태]
독무덤의 형태는 일상용 토기 2개를 가로 방향으로 합구시킨 유형과 대형의 전용 옹관을 사용한 2가지 유형이 확인된다. 전자의 유형은 1963년 전라남도 광주시 신창리[현 신창동]에서 최초로 조사되어 신창리식 옹관으로 명명되었으며, 기원전 1세기 무렵으로 편년된다. 후자의 구조는 전용 옹관의 초기 단계로 기원 3세기경에 해당하며 어깨에는 톱니 모양의 거치문(鋸齒文)이 있고, 몸체 전면에는 격자문이 있다. 널무덤은 평면 형태의 장방형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이고 유물은 북벽 쪽에 부장되었다.
[출토 유물]
1세기경 독무덤에서는 옹관으로 사용된 항아리가 주를 이루며, 일부 항아리와 청동제 칼자루끝장식[청동제검파두식(靑銅製劍把頭飾)]이 출토되었다. 3세기 독무덤에서는 입큰항아리와 옥이 출토되었다. 널무덤에서는 항아리와 단지가 출토되었다.
[현황]
광주 신창동 유적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어, 독무덤이 조사된 지점은 원형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신창동 옹관묘지가 발굴된 광주 신창동 유적은 기원전 1세기~3세기경에 해당하는 매장 시설과 농경 유적이 어우러진 복합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옹관묘는 전형적인 무문토기 문화의 전통속에서 영산강 유역의 토착 농경민이 영아들을 위한 묘지로 선택한 곳으로 조영되기 시작하였다. 신창동 옹관묘지는 1963년 조사 당시 일상 토기를 이용한 합구식 옹관묘로 알려져 있으나, 2002년 조사에서는 영산강 유역 전용 옹관묘의 항아리를 이용한 독무덤[옹관묘]과 널무덤[토광묘] 등 새로운 자료가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