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61
한자 趙鏞聲
영어공식명칭 Jo Yongseong
이칭/별칭 정견(正見),조용성(趙鏞成),조위대(趙渭大)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운곡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9월 13일연표보기 - 조용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조용성 합안읍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5일 - 조용성 징역 1년 형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61년 8월 27일연표보기 - 조용성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 - 조용성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조용성 합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운곡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운곡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읍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9일 일어났다.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배하러 갔다가 서울의 독립 선언식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 등이 대산면에 사는 안지호(安知鎬)와 의논하여 계획되었다.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 운동을 전하였다. 오후 2시 3,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에 마산 경찰 서장과 현지 경찰들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시위 군중은 격노하여 경찰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시위 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하지만 파견된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과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며 끝이 났다.

[가계]

조용성(趙鏞聲)[1897~1961]은 자는 정견(正見)이고, 조용성(趙鏞成) 또는 조위대(趙渭大)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조형규(趙亨奎)이다. 아들은 조갑제(趙甲濟)이고, 손자 조정래(趙政來), 조창래(趙彰來), 조명래(趙明來)가 있다.

[활동 사항]

조용성은 1897년 9월 13일 함안군 산인면 운곡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직업은 한문 교사이었다. 함안읍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3월 19일 정오 비봉산 고천제와 태평루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이후 진행된 시위행진 때에는 선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재판 기록에 재판장은 "조용성은 함안읍 소요에서 등기소를 습격하여 다른 폭도와 같이 출입문을 파괴하고 군중과 어울려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라고 하였다. 오하야시 순사 부장도 등기소의 문을 다른 폭도와 같이 파괴하였다고 증언하였고, 최근호 순사보는 조용성은 주재소에서 만세를 외쳤다고 증언하였다. 조용성은 5월 15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받아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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